[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차는 사람이 달여 하늘에 올리는 공양으로 시작되었다. 맑은 샘물을 길어 불을 지피고, 어린 찻잎을 달여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 일은 곧 자신의 마음을 부처와 하늘에 바치는 수행이었다. 한국 차문화는 이러한 공양차(供養茶)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신라 차문화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이 하늘에 차를 올린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에게 차를 올렸다는 이야기. 그 주인공이 바로 오대산의 수행자 정신(淨神)이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에는 정신이 오대산 신성굴에 머물며 오십 년 동안 한결같이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세상을 떠돌지도 않았다. 다만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닦으며 오직 도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오십 년. 한 사람의 일생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계절은 수없이 바뀌고, 나무는 자라 숲이 되었으며, 함께 수행하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지만, 정신은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했을까. 《삼국유사》는 놀라운 장면을 기록한다. 정거천(淨居天)의 하늘 무리가 차를 달여 정신에게 공양하였다. 이 한 줄은 한국 차문화사에서 가장 신비롭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차 한 잔에도 역사가 흐른다. 차는 산사의 선방이나 문인의 서재에서만 향기를 피운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잊힐 뻔한 조상을 다시 불러들이는 제단 위에서도 말 없는 역사가 되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 삼국을 통합해 가던 격동의 시대, 그 중심에 김유신과 문무왕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군신(君臣)이면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가 문무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 그 혈맥은 모두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닿는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세손이었고, 문무왕은 어머니 문명왕후를 통하여 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시조로 받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통일은 신라가 가야ㆍ백제ㆍ고구려를 정복한 승자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가야의 혈맥이 신라 안에서 다시 살아나 통일을 이루고, 마침내 그 조상을 차향으로 기린 생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595년 신라에 귀속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가야의 멸망과 신라로의 귀속, 차별과 수용, 전쟁과 화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김대렴이 지리산에 심은 차씨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차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해서 곧 문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차는 수행을 만나야 도(道)가 되고, 시를 만나야 향기가 되며, 글을 만나야 역사가 된다. 그 위대한 만남을 이루어 낸 두 사람이 바로 진감국사 혜소와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한 사람은 선(禪)의 향기를 몸으로 실천한 수행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향기를 천년의 문자로 남긴 문장가였다. 차를 마신 이는 진감국사였고, 차의 정신을 역사로 승화시킨 이는 최치원이었다. 진감국사 혜소(774~850)는 젊은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스물일곱 해 동안 선을 배우고 수행하였다. 그는 차가 이미 선종 수행과 하나가 된 중국 선림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귀국한 뒤 하동 옥천사, 곧 오늘날의 쌍계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며, 지리산 차를 수행 속에 녹여 냈다. 그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이 바로 최치원이 지은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그 비문에는 진감국사가 산중에서 차를 달여 마시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차를 즐기기 위해 마신 것이 아니라 목마름을 적시고 마음을 맑히기 위해 마셨으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충담사의 차공양으로 향기를 얻었고, 월명사의 향가로 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 향기와 정신을 천년의 차밭으로 키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김대렴과 흥덕왕이다. 한 사람은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나라의 땅에 심게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알의 씨앗을 심은 일을 넘어, 한국 차문화사의 새로운 문명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흥덕왕조에는 짧지만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크게 성행하였다.” 불과 몇 구절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록은 한국 차문화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바다를 건너온 작은 차씨가 임금의 뜻을 만나 지리산에 심어지고, 마침내 천년을 이어 갈 차문화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김대렴을 우리나라에 차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료는 분명히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한다. 김대렴 이전에도 신라에는 차가 알려져 있었으며, 왕실이나 절을 중심으로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산중의 수행에서만 꽃핀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도 차향이 스며 있었고, 불전에도 차연이 올랐으며, 향가의 선율 속에도 차 한 잔의 맑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경덕왕(景德王)과 월명사(月明師)가 있다. 경덕왕은 신라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성숙한 시대를 이끈 군주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이 나라를 상징하고, 불교예술과 향가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실은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예(禮)와 공양, 그리고 덕을 나누는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월명사의 도솔가 (月明師兜率歌)에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은 월명사의 향가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품다(品茶) 일습(一襲)'을 내렸다고 하였다. '품다'는 문자 그대로는 차를 음미한다는 뜻이며, '일습'은 한 벌의 의복이나 예물을 가리킨다. 학자들 사이에는 차와 다구를 함께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차를 마시는 예를 베풀었다는 해석이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임금이 차를 으뜸 예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차가 이미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월명사는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한국 차문화사에서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가장 오래된 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차를 즐긴 차인이 아니라, 차를 수행과 공양의 길로 승화시킨 신라의 왕자들이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두 사람을 신문왕계 왕자일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으며, 왕위 계승 과정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세속의 권력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던 인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들이 남긴 삶은 은둔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더 깊은 기도였다. 《삼국유사》에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각각 암자를 짓고 새벽마다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 올리며(煎茶供養)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전차(煎茶)'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며, 한국 불교 차문화의 출발을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오대산의 새벽은 언제나 맑은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문수봉을 감싸는 운무 사이로 샘물을 길어 와 조용히 불을 지피고, 맑은 물이 끓어오르면 정성껏 차를 달여 문수보살께 올렸을 것이다. 그 차는 갈증을 풀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두 개의 큰 산이 나란히 서 있는 듯하다. 하나는 원효(元曉)이고, 다른 하나는 의상(義湘)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행하였으며,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난 평생의 도반이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어도 바라보는 하늘이 다르듯, 그들의 구도는 어느 순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갈라짐이 아니었다. 강물이 좌우로 나뉘어 흘러도 끝내 하나의 바다에 이르듯, 원효와 의상의 길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진리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젊은 두 승려는 당시 불교의 중심이던 당나라 장안으로 향하였다. 신라에서 배우고 익힌 가르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들은 더욱 넓은 세계에서 부처의 뜻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넘기 전, 어느 토굴에서 하룻밤을 머물던 중 원효는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물을 마셨다. 달빛도 들지 않는 밤, 그 물은 세상 어느 감로수보다 시원하고 달게 느껴졌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보니 그 물은 해골에 괴어 있던 빗물이었다. 순간 속이 메스꺼워졌지만, 원효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밤에는 감로였고 아침에는 더러운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천년의 도읍 서라벌을 감싸안은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크고 작은 절과 탑이 이어지고, 바위마다 부처가 새겨져 있으며, 골짜기마다 맑은 샘이 흐르는 살아 있는 불국토였다. 사람들은 남산을 오르며 부처를 만났고, 수행자를 만났으며,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만났다. 그 남산에서 차를 달여 미륵보살께 공양하며 수행한 승려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담(忠談)이다. 《삼국유사》는 충담이 삼화령(三花嶺) 고개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우리 차문화사에서 차가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불전에 올리는 공양이자 수행의 한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충담에게 차는 갈증을 푸는 물이 아니라 마음을 씻는 맑은 향기였고, 부처 앞에 자신을 바치는 가장 깨끗한 정성이었다. 차는 한 잔이었지만 그 안에는 미래를 향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미륵은 아직 오지 않은 부처였다. 언젠가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었다. 충담이 올린 차 한 잔은 단순한 공양이 아니라, 더 밝은 세상을 기다리는 희망의 기도였으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한 자비의 마음이었다. 차향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의 차인(茶人)을 말할 때 사람들은 대개 원광, 자장, 충담을 먼저 떠올린다. 이들은 차를 수행과 공양의 삶 속에서 실천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차를 직접 기록하지 않았으면서도 우리 차문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신라의 구법승 혜초(慧超)다.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고, 해로를 거쳐 인도에 도착, 당시 오천축국을 둘러보고 다시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순례한 뒤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정은 오늘날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는 장대한 구도의 길이었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우리 민족 첫 세계여행기자, 동아시아 불교문화사에서 매우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1908년 프랑스인 펠리오에 의해 돈황 장경굴에서 발견되어 1909년 금석학자 라진옥에 의해 고증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 긴 여행기 어디에도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의아한 일이다. 당시 당나라는 이미 차문화가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불교 절에서도 수행 중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점차 자리 잡고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의 자장율사(590~658)는 한국 불교의 계율을 바로 세운 율사(律師)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우리 차문화의 역사 속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뜻밖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록 자장이 직접 차를 심고 마셨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수행의 정신과 도량은 훗날 한국 선차(禪茶) 문화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자장은 선덕여왕의 뜻을 받아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구하였다. 그는 계율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五臺山)을 찾아 수행하였다. 당시 오대산은 당나라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크고 작은 절마다 참선과 독경, 계율 수행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수행자들은 좌선과 경전 연구 사이에 차를 달여 마시며 정신을 맑히고 마음을 다스렸고, 선차의 풍습은 이미 절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 험난했던 구도의 여정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전한다. 필자는 오대산을 답사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慈藏當年參聖跡(자장당년참성적) 자장은 그 옛날 문수보살의 성지를 찾아 수행하였고 文殊親授袈裟香(문수친수가사향) 문수보살로부터 가사의 향기를 전해 받았다 舍利東歸開佛國(사리동귀개불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