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벽제관 터는 수퍼나 우체국에 갈 때면 으레 들리는 곳이다. 지금은 주춧돌만 덩그마니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에서 심의한 조선고적(朝鮮古蹟) 명소에 뽑힐 만큼(1931.6) 고색창연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 할 때 반드시 들러야하는 오늘날의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중요한 관문이었다. ▲ 지금은 터만 남은 벽제관터(한자 지 '址'보다는 우리말 '터'로 고쳐 써야 한다) 벽제관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세종 5년(1423) 9월 5일)을 보면 세종임금이 중국 사신을 배웅할 때 벽제관까지 세자를 보내야할지 말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예전에 사신 황엄(黃儼)이 돌아갈 때에, 세자(世子)가 벽제관(碧蹄館)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또 세자가 작별할 때 읍(揖)을 해야하나? 절(拜)을 해야하나? 라고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였으니 벽제관까지 가서 전송하는 것이 옳았지마는 지금은 세자께서 나이 어리니 갈 수 없으며, 교외(郊外)에서 배례(拜禮)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합니다.
[얼레빗=이윤옥 기자] 이른 아침 잔디에 이슬이 촉촉이 맺혀있는 인원왕후 무덤 명릉(明陵)에 다녀왔다.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안의 명릉에 잠들어 있는 인원왕후 무덤을 찾은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의 친정아버지 김주신이 머물던 대자동의 영사정(永思亭)과 관련된 기사를 쓰다가 인원왕후를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 집안사람들의 인품이 사람을 매료하게 하는 점이 있어 인원왕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실제로는 민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에 이어 3번째)왕비이다. 나이 16살에 왕비가 되어 숙종과 19년을 살았지만 소생이 없었다. 그러나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를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특히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연잉군은 훗날의 영조임금이다. 숙종과 최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이 된 이래 인원왕후를 친어머니만큼 극진히 모셨으며 인원왕후 사후에는 눈물을 흘리며 친히 대왕대비행록(영조 33년,1757년)을 짓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 무덤 (아래 언덕 왼쪽에는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가 잠들어 있다)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비단옷 입고 고기반찬에 포만한 자들이여/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날짐승 길짐승이 보금자리 달리하듯/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이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선생의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라는 시의 일부이다. 평생 술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벼슬에 기웃거리지 않고 산수를 즐겨 유랑생활을 했던 그는 한때 술을 너무 밝혀 어머니의 근심거리였는데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술을 끊는 시(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을 만큼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남효온 선생은 조선 단종 때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했다. 영의정 남재의 5대손으로 고양(행주)에 살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풍자하는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추강냉화》와《추강집》에 그의 대쪽 같은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특히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목숨을 건 6명의 충절을 담아 쓴 사육신(死六臣) 이야기인《육신전 六臣傳》은 남효온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임을 잘 나타내는 책이다. ▲ 행주나루터에 있는 남효온 시비 사육신이란 성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