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에는 역술인들이 앞 다퉈 '정도령'을 점지하고 나섰다. 동시에 각 선거캠프에서는 우리 후보가 정도령이다.고 말하기 바빴다. 최고의 예언서라는 정감록에는 정작 정도령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건만 이유가 어찌됐건 정도령을 차지하려고 서로들 무던 애를 썼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정주영 측도 성씨가 같다는 연유로 정주영이 정도령이라 했고, 이 말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정도령은 누구이며, 왜 서로들 정도령을 차지하려고 할까? 정도령은 예언서로 잘 알려진 《정감록(鄭鑑錄)》과 《격암유록(格菴遺錄)》에서 예언하고 있는 민족의 구원자다. 그가 정작 어떤 성씨를 가졌으며 언제 나타나 어떤 큰일을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까닭은 《정감록》과 《격암유록》이 온통 파자법(破字法, 여러 의미로 결합되어 있는 글자를 분해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법)으로 쓴 암호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그래서 수많은 정도령이 나오게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정주영은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외치며 1992년 12월 제14대
[그린경제/얼레빗=감영조 기자]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해 22회에 걸쳐 그의 인생 전반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일화를 수없이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이 나중에 소 1000마리를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사건은 세기의 뉴스거리가 되었고, 20세기 봉이 김선달이라 할 정주영이 황량한 미포만 사진 한 장으로 조선소를 짓고 26만 톤 유조선을 만든 일화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하고 10층 빌딩만 한 구조물 89개를 인도양 건너 운반한 상상초월의 일이라든지, 23만 톤 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서산간척지를 완성하고 한반도 지도를 고친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망신만 당하지 말라던 올림픽 유치전에서 당당히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88올림픽을 따낸 일도 그의 진가를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가하면 위기를 극복한 오뚝이 일화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 정주영 회장이다. 어렵사리 차린 자동차수리공장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화재를 만나 빚더미에 올랐을 때도 그는 절망하거나 주저 않지 않았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가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다. 나한테는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이, 5월 어느 날, 문교부 장관이 대통령 결재까지 맡았다고 하며 자신을 위원장으로 한 민간 7인 위원회라는 것을 누런 종이에 시커멓게 프린트한 것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정부의 체면이 서도록 해주면 좋겠다.라고 사정했다. 결국 그 임무는 돈이 있다는 것과 전경련 회장이란 명분으로 정주영에게 떠넘겨 진 것이었다. 하지만,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올림픽을 치르려면 경비가 약 8000억 원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곳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겨진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을 정주영은 원래 그의 생각대로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이왕 맡은 이상 정주영의 진가를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세계 사람들은 당시 한국에 가면 아직도 전쟁고아가 득실거리고 총알이 빗발치는 줄로만 알던 때였다. 또 그보다 10여 년 전 1974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다가 개최 능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반납한 적이 있었다. 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 이제 미국이다. 자동차의 본고장 철옹성 미국에 상륙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돌아간 현대자동차. 1985년 1월 샌프란시스코 대리점 컨벤션 기간 중에는 무려 3000여 개나 되는 미국 내 유명 대리점이 앞 다투어 방문해 현대만을 위한 잔치가 될 정도였다. 현대가 이렇게 미국에서 첫 대면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웃 캐나다에서의 포니 돌풍이 미국 언론을 통해 속속들이 알려진 덕분이었다. 1985년 4월 드디어 미국 LA에 6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현지법인 Hyundai Motor America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현대 포니의 인기가 올라가자 언론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뉴스위크지 85년 10월호는 한국이 온다(Koreans coming)라는 제목의 표지 특집으로 포니 엑셀을 크게 소개했다. 현대는 1986년 GM, 포드, 클라이슬러가 버티고 있는 미국땅 플로리다주 잭슨빌항에 포니 1호차를 처음 내려놓았다. 그리곤 1년 만에 20만대의 판매실적을 내놓았다. 미국 환경보호청이 발표한 86년 미국 내 자동차판매 베스트10에 들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1987년 26만대, 1988년에는 30만대, 그리고 1990년에는 미국 현지 판매 10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폭발적인 인기를 끈 포니, 당나귀란 뜻을 지닌 포니라는 이름은 한국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답게 공모에 의해 결정된 이름이었다. 아리랑, 새마을, 무궁화, 진돗개 등을 물리치고 뽑힌 이름 포니는 빠르거나 중후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이름처럼 귀엽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어 어쩌면 그 이름도 성공요인의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때 현대자동차 사장이었던 정세영은 국제사회에서 포니 정이란 애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포니의 인기는 지칠 줄 몰랐다. 1977년 1만9847대를 팔아 시장점유율 54.1%로 내수시장을 석권하더니 1978년 3만8411대, 1979년 4만6971대로 판매대수가 점점 늘어났다. 한국 실정에 잘 맞는 자동차라는 점 말고도 포니는 한국 최초의 국산자동차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덕이기도 했다. 포니는 한국경제 구조가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포니의 성공으로 관련 산업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됨과 더불어 2차 산업 곧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2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촉발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정주영이 포니를 한국의 자동차로만 안주하게 내버려둘 사람은 아니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멋지게 해치운 정주영은 또 하나의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수리가 아니고 번듯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자동차산업이야말로 현대산업의 꽃이자 국력의 잣대이다. 또 다른 산업과 달리 철강・기계・전기・전자・화학・섬유 등 2만 여개의 부품을 각기 다른 생산공정을 거쳐 생산하고 그것들을 조립해서 완성하는 종합산업이 아니던가? 더구나 정주영은 처음 사업을 자동차로 시작했었기에 자동차산업의 완성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 중의 산업이라는 자동차산업이라는 것이 어디 꿈만 가지고 될 일이랴. 그 나라 최대의 자본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는 미국・일본・서유럽 등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때였다. 1966년 4월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가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 조사와 함께 합작 법인 설립을 위해 타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울에 왔을 때 단순한 건설업체로 인식되던 현대는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그 무렵 신진공업사는 정부 도움으로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코로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공사를 해치운 그것도 공기단축이란 성과까지 올리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 공사로 현대건설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에 들어선 듯했다. 그러나 인생살이란 것이 늘 좋을 수만은 없는 법. 하루 평균 3000여 명이 넘게 일하는 현장에서 정주영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저것들 모두 때려 부숴버리자. 혼 좀 내줘야 해. 우리를 물로 봐도 분수가 있지. 덤프트럭 기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근처 동아건설 덤프트럭 기사들에 견줘 임금을 반도 못 받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동아건설은 개개인에게 물량 하청식으로 일감을 주어 쉼 없이 하루 16시간까지 일을 한 까닭으로 임금을 많이 받았는데 단순비교로 자신들의 임금이 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20㎞밖에 떨어지지 않은 석산까지를 시속 20㎞로 천천히 왕복하는 태업을 했다. 그러자 직원 한 사람이 공기에 쫓긴 나머지 덤프트럭 기사와 말다툼을 벌이다 안전모로 기사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 직접적인 폭동의 계기가 되었다. 현장 직원은 늑장을 부리는 기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 다급한 마음에 그랬지만 머리를 맞은 기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입찰에 실패한 기업들의 훼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우디 무기상으로 사우디 왕족들과 대단한 친분을 과시하고 있는 한 인사는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면 내 오른팔을 잘라도 좋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발주처가 현대의 OSTT(Open Sea Tanker Terminal) 곧 해상유조선 정박시설 공사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현대는 OSTT에 대해 공사 경험은 물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발주처의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30m 바다 밑 암반에 30m 기초공사를 12㎞나 해내야 하니 이거야말로 난공사 중에 난공사 아니던가? 사실 입찰에서 현대보다 적은 금액을 써내 처음 낙찰되었다가 OSTT에만 한정된 금액으로 써낸 탓에 무효가 되었던 OSTT 공사의 전문기업인 브라운 앤드 루츠사의 입찰금액이 9억 달러인 것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브라운 앤드 루츠사가 현대에 찝쩍거렸다. 자기들에게 OSTT 부분을 하청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자기네 견적에서 금액을 낮추겠다고 했지만 브라운 앤드 루츠사에 하청을 주고 나면 현대는 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겨우 일어선 현대조선이 쓰러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러자 정주영은 다른 위기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그까짓 거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로 직접 사업을 하자. 무수히 시련을 당했던 정주영. 그러나 그때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톡톡 튀는 기발한 생각으로 헤쳐 나오던 그였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으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남의 나라 배로 기름을 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업이든지 그에게 호락호락한 것은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랐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칼만 안든 강도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썼지만 이제 배가 생겼는데 당연히 우리 배로 실어 날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 쓸 것이므로 그에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버티던 아세아상선은 결국 그들에게 돈 한 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당신이 배를 사주면 영국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을 얻어 영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이 돈으로 이 사진 속 백사장에 근사한 조선소를 지어 당신 배를 멋지게 만들어 주겠소. 나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조선소보다 더 멋진 배를 다른 데보다 더 싸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만일 배가 맘에 안 들 것을 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반대급부 지불보증서를 제출할 것이고, 이것이 손해배상을 보증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계약금은 물론 중도금 등의 원금과 이자까지 가만히 앉은 채로 받을 수 있게 은행으로 송금해주겠소. 정주영은 이런 미친 설득을 선주들에게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설득이 쉽게 먹혀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야말로 사생결단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일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꼭 정주영처럼 미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1세기 가까이 해운업을 해오는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그는 한때 처남인 선박왕 오나시스를 능가하기도 했던 거물 해운업자였다. 리바노스는 정주영이 보여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선뜻 계약했다. 리바노스는 파격적으로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만들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