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사실 정주영이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1960년대 말 조선소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단순히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1070년대 초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불렀다. 청와대로 들어간 정주영에게 박 대통령은 다짜고짜로 조선소를 만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곧 준공될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의 소비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가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설을 타진했지만 거절한 상태였다. 아니, 정 회장.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배짱도 없이 쉽게 포기해 버려요? 내 체면을 봐서라도 해봐야지. 어디 대통령 망신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요? 박 대통령이 정주영에게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주영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박 대통령이 담배를 권하자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면서 고민하던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왕 할 바에야 보란 듯이 해버리자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사실 조선소 건설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정주영에게 밀려 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정식 이름이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이지만 우리는 흔히 아우토반(Autobahn)이라고 부른다. 도로의 너비는 18.520m이고, 길 가운데는 3.55m 너비의 중앙분리대가 있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를 왕래하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됐는데 오늘날에는 총연장 1만1000㎞에 이르며 독일 땅의 대부분에 미치고 있다. 제한 속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의 하나이지만, 위험지역에서는 100㎞ 또는 130㎞의 제한속도 표지가 붙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06년 월드컵 직전 공연단 취재차 가봤던 독일, 일반도로에서는 철저히 제한속도를 지키며 다니던 자동차들은 아우토반에만 들어서면 대부분 시속 200㎞로 달렸다. 빨라야 110㎞를 달리던 한국에서 200㎞를 달리니 오금이 저리기도 했지만, 짜릿한 쾌감도 순간 느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했고, 이 아우토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본에서 쾰른으로 가는 20㎞ 구간의 아우토반을 지나가면서 박 대통령은 두 차례나 차를 멈추고 독일 관계자들에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공사비용은 얼마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강인도교 공사로 6대 건설사에 등극한 정주영은 그것에 만족할 사나이가 아니었다. 공사를 해나가면서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사들인 큰 덕을 봤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은 시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공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자재 시멘트는 1950년대 후반 무렵에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1958년을 보면 약 56만t의 시멘트가 필요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시멘트는 25만t에 그쳤으며, 1959년에도 45만t이 있어야 했지만 41만t에 그쳤다. 부족한 시멘트는 다른 나라에서 들여와야 했지만, 수입 시멘트는 관세가 붙어 그만큼 가격도 높아져 공사원가도 덩달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인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시멘트 수요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전쟁 뒤여서 길을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 학교를 지어야만 했는데 시멘트가 없어 현장에선 일손을 멈추어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 바로 정주영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게 된다. 시멘트가 모자라면 만들면 되지 않을까? 자동차, 건설에 이어 시멘트 사업을 벌이려는 정주영의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던 순간이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망한 것 같았던 현대건설, 그리고 아우‧매제와 함께 펑펑 울었던 정주영은 고령교 복구공사의 시련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국내 최고의 난공사였던 고령교 공사의 실패를 곰곰이 새겨보니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장비 부족이 아니었던가?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일꾼들을 모으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일꾼 10명, 100명의 몫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장비는 마음대로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장비를 갖고 있는 업체에 세를 주고 빌려 쓸 수는 있었지만, 비싼 세를 지불하면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결론적으로 고령교 공사의 실패는 경험이 모자라고 장비가 부족해서였을 뿐 실패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감폭호 부감풍하(不敢暴虎 不敢馮河,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널 수 없다. 정주영은 당시 《시경(詩經)》의 이 문구가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의 가장 큰 과제는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비부족을 해결하는 정주영의 솜씨는 남달랐다. 마침 미군은 매주 못쓰게 된 장비를 민간업자에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모두가 반대하던 건설업, 정주영이 하면 성공한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던 정주영의 건설사업은 어려움 속에서도 착착 성공에의 길로 한발자국씩 접어드는 듯했다. 처음 얼마간은 미군의 절대적인 믿음 속에 미군 건설 공사를 독점해가면서 승승장구 하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정주영 앞에 또 하나의 시련의 강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3년 6월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미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주영은 미군 공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부의 전후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건설은 조폐공사가 발주한 고령교 공사를 수주했다. 물깊이가 무려 10m나 되는 곳에 열세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60m짜리 다리 몸체를 놓아야 하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공사였다. 2년의 공사기간에 계약금액 5457만환이었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로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정부가 시급하게 놓아야만 했으며, 그때까지 정부 발주 공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기에 정주영은 복구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무작정 공사를 시작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전 시미즈(淸水)건설 조선지점에서 풍부한 교량공사시공 경험을 갖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은 건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중동건설 붐을 타면서 봇물 터지듯 했던 해외건설 수주는 당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2014년에도 여전히 건설회사 도급순위 1위를 달리는 현대건설은 직원들이 한국에는 경쟁자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미 중동 건설 붐 때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현대, 그런 정주영도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흔히 정주영은 롤러코스트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만큼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런 롤러코스트 삶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건설사업은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을 목격했다.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정주영은 분야가 다르지만 우리도 일을 죽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안 되겠다. 이왕이면 나도 큰돈을 받는 일을 해야지.라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며 차린 아도비서비스 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 앉아 나오느니 한 숨 뿐이었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정주영은 아니었다. 망연자실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얼핏 참외장수 아주머니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거지아이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낡은 하숙집 벽을 타고 살고자 끊임없이 기어오르던 빈대도 생각이 났다. 거지아이는 어떤 희망보다는 그저 참외 하나 얻어먹고 순간의 배고픔을 참으려 했고, 빈대도 그저 본능적으로 위로, 위로만 올라가는 것 말고는 무슨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거지아이와 빈대가 지금의 정주영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절망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지아이와 빈대에 견주면 정주영은 분명히 절망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예전에 돈을 꾸었던 오 영감을 부리나케 찾아갔다. 영감님,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감님 빚은 못 갚을 테고 그러면 영감님의 평생 업에 누가 되는 것 아닙니까? 빚을 갚도록 돈을 더 빌려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숫제 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의 꿈같은 첫 사업, 쌀가게는 승승장구했다. 성실하게 운영한 덕에 단골손님은 나날이 늘어갔고 가게는 번창했다. 운명일 수도 있는 첫 사업 쌀가게는 보배였다. 그러나 그런 달콤한 세월도 두해 남짓, 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운명이 그 앞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송두리째 먹기 위한 침략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1937년 7월7일부터 노구교사건이라 하여 중국군과의 충돌을 거짓으로 꾸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곧바로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다.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 등을 거둬들이고, 군수품 통제를 시작으로 정미소까지 통제했다.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시작됐고, 전국의 쌀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농민들이 지은 곡식을 수탈해 일본군에 보내고, 일본 본토로 가져가기 위한 수작이었다. 정주영도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정리해야만 했다. 쌀가게를 정리한 뒤 그의 손에 떨어진 돈은 1000여 원 남짓이었다. 쌀가게를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이 돈으로 아버지께 논 2000평을 사드렸다. 가출 네 번 만에 첫 효도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고향에 오래 머물지 않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버지 손에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다시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뒤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굳은 결심으로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또 다시 마음은 서울에 가 있었다. 흉년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는 농촌현실은 희망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동창 오인보와 함께 기어이 4번째의 가출로 서울 땅을 밟았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일거리가 많다는 인천 부둣가에 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쉼 없이 짐을 지어 날랐다. 그러나 이도 밥 세 끼를 먹기에 급급한 형편없는 수입이었다. 하루 품삯은 고작 50전으로 먹고 자는데 드는 돈을 빼면 20전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는 합숙소는 빈대가 들끓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나서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은 자야했기에 할 수 없이 그는 식탁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빈대는 식탁 위의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정주영은 생각 끝에 식탁의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놓고 잠을 잤다. 그런 방법으로도 곤히 잘 수 있었던 건 이틀에 불과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년 탄생 100주년-소처럼 우직했던 천재적인 뚝심의 기업가 어린 농꾼 樂은 신문 읽는 것한밤 2㎞ 걸어 구장집서 신문 구해 읽어 평생 농투성이로 살 수 없다 비상금 47전 들고 동네 선배와 첫 가출 길거리 거지의 끈질긴 생존법 간절해야 세상을 살 수 있다 큰 깨달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봉식은 약 4000평의 논밭을 소유한 중농이었는데 먹고 살기가 빠듯한 정도였다. 그런 가정에서 정주영은 서당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에게 다섯 살 되던 무렵부터 여덟 살까지 《동몽선습》,《소학》,《대학》,《맹자》,《십팔사략》 따위를 배웠다. 서당을 마친 정주영은 열 살 되던 해에 송전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공부를 하고 2등으로 졸업했는데, 이는 정주영의 최종학력이 된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때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동아일보를 읽는 것이었다. 농사일이 끝나면 날마다 밤에 2㎞ 떨어진 구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빌려, 연재되고 있던 소설 이광수의 흙을 호롱불 아래에서 읽었다고 한다.《소학》과 《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