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분홍 아지랑이로 버디기재 마루가 가물거리고 강 건너 큰골 장끼소리 빨랫줄 타고 내 귀에 꽂히면.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마른버짐 얼굴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기계충* 꽃 까까머리에 빨갛게 피어나면. “할머이, 제비는 운제 와?” 이제 제비만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나의 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아 하늘님이 제비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라고 시킬 것 같았다. 그러면 뜬구름으로 떠도는 아부지도, 돈 벌러 서울로 간 어머이도 돌아와 온 식구가 오순도순 한 군데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똥 앉은 꽁보리밥은 더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2) 제비가 와야 한다. 홍매화 지는 창가에서 내다보니 아직은 메추라기와 직박구리 같은 겨울새나 텃새들만 보이지만 밭가에 냉이꽃 피고 개구리 소리 들려오니 제비도 곧 오겠지. 그래야 제대로 갖춰진 봄이라 할 수 있겠지. 과연 우리 집 처마 밑에 집을 지을까? 우리가 거들어 줄 방법은 없을까? 쑥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며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숟가락을 손에 들고 아침부터 제비 얘기만 해댔다. (3) 그래,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은하수를 건넜는지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너, 김진성 형 알지? CBS. 그리고 진이 형, 이진. 어제 모처럼 만에 만났다. 얘기 끝에 네 얘기도 했다.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젖은 솜이불처럼 그를 짓누르던 깊은 좌절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스타 방송작가였다. 유명 방송사의 라디오 간판 프로들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파산”이라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물질적인 걸 모두 잃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리고 잃은 물질이야 열심히 다시 뛰면 만회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옳았다. 하지만 그 믿음의 실현을 위해선 무서운 의지가 필요했다. “형. 우리 노가다 판이라도 나갑시다. ‘나 죽었소.’하고 한 몇 년 종잣돈 만들어 다시 시작합시다.” 내 말에 솔깃하여 관심을 두는 듯했으나 그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언제 내가 저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콘크리트 두들겨 깨는 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고막을 찢었다. 희뿌연 분진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땐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늘 벙거지를 눌러쓰고 다녔고, 옷이며 신발이며 온몸에 때 국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재주에 동문서답을 해대기 일쑤이니 같이 얘기하려면 웬만큼의 참을성은 바탕에 깔아야 했다. 그는 경기도 어디쯤 가서 파지를 주우며 산다고 했다. 내게 올적엔 어떤 때는 한참을 걸었는지 옷을 털면 금방이라도 먼지가 풀썩일 것 같았다. 그런 그였지만 밥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막걸리가 주식이니 밥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주독이 쌓여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에 군데군데 쌀알 같은 게 돋아 있기도 했다. 머릿속에 환등기가 켜졌다. 흑백사진이 여러 장 지나갔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철옹성인 줄 알았던 18년 절대권력이 무너졌다. 아직은 곳곳에 왕조숭배사상이 남아 있던 터여서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줄 알고 벌벌 떠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이라도 김일성이가 쳐내려올 것 같고 수출길이 막혀 공장이 멈추고 다 굶어 죽을 것 같은데도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3김 시대”가 오는 듯했으나 어느 귀신이 채 갔는지 “3김”의 3자조차 증발해 버리고 영문 모를 총성이 서울 밤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방효유(方孝孺)는 명(明) 초기의 학자로 건문제의 스승이다.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자, 그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역사상 최악의 필화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영락제(永樂帝)가 있었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체(棣), 열한 살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태조가 죽자 장남 표(標)의 아들인 윤문(允炆)이 2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야욕가인 그는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워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토벌 한다.”라는 구실을 달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를 빼앗는다. 조카 건문제 주위의 신하들을 모두 살해했으나 방효유만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즉위조서를 써 달라며 구슬렸다. 완강히 버티던 방효유는 영락제의 거듭된 종용에 마침내 붓을 든다. 잔뜩 기대하며 지켜보던 영락제에게 전해진 종이에는 단 네 글자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둑이 황제 자리를 빼앗다)였다. “네 이놈! 구족을 멸하리라.” “구족이 아니라 10족을 멸해 보거라. 내가 눈 하나 깜빡 하나!” 방효유의 입은 그 자리에서 찢기고 10족 색출의 회오리가 분다. 당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내겐 자신을 “DNA 반역자"라 부르는 벗이 한 명 있다. 지천명에 가깝도록 인류의 보편적 삶에 세뇌되어 살다가 반백(半白)이 되어서 반역의 길에 발을 들여놨다. 사업의 실패가 잠자던 그의 반골기질을 깨운 것이다. 그는 이참에 종전의 자신의 삶을 확 뒤집기로 작정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도시의 표상인 서울을 버리기로 하고 그길로 아내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떠났다. 달랑 칠십 만원이 남은 재산의 전부였다. 부부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강원도 산골이었다. 부부는 그곳에서 남의 집 날품팔이로 연명하며 뒷날을 도모한다. 몇 해 뒤 성실과 근면으로 노력한 끝에 인적 없는 골짜기에다 반역의 본거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전력 혜택은 거부했지만, 산채만큼은 흙벽돌로 제법 그럴 싸 하게 지었다. 그때를 시점으로 그는 본색을 드러낸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현생인류의 뇌 구조에 반기를 들고 혁명의 나팔을 분 것이다. 우선 무슨 무슨 날이니 하는 “날”부터 없애기로 했다. 명절, 생일, 결혼기념일, 제삿날…. 강요당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으로 한 일이 어머니를 갑갑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고 눈만 뜨면 어리둥절한 뉴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군인 이름들이 언론매체를 도배질하던 그 겨울에 육군본부에도 궁정동에도 무주공산 청와대에도 눈은 내렸다. 처음 겪어보는 극단의 회색이었다. 하늘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음악 선율도 온통 회색조(調)였다. “김대중이가 잡혀갔대.” “김영삼이 김종필이도 가택연금 당했다는구먼.” 사람들의 수근거림마저 우중충하던 세모(歲暮)였다. <손시향 - 검은 장갑. 지나가다가 밖으로 음악 소리가 새 나오기에 이 노래가 생각나 들렀소이다. 혹시 음반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음악실에서 바라본 입구 쪽 자리는 멀기도 하려니와 음악실 유리에 조명 빛이 반사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형상이나 글씨체나 신청곡으로 보아 노신사임이 분명했다. 아직 교대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도 뒷 진행자의 양해를 얻어 서둘러 음악실을 나왔다. “저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음반이 없어 들려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 디제이 양반 탓이오? 괜찮으니 앉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결과적으로 인류사회에 자본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하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에 가장 알 맞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산업혁명”은 공장제 성립 이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면직기계와 증기기관의 발명, 제철기술의 발달로 영국의 산업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1차 산업혁명”이란 것인데, 이 질풍노도는 구미 각국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었고 자연스레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상업주의”라는 자식 까지 얻게 된다. 윤택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후에도 계속 산업혁명을 촉발시켜, 우리 인류는 지금 5차 산업혁명을 코앞에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의 태풍은 그 발생지인 유럽을 훑고 머잖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사기노미야 무쓰히토라는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700년 동안이나 군림해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국어사전에서는 “음악”을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형식에 의해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 풀이하고, “노래”는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 이전에서의 제대로 된 “음악”은 일반 백성이 가까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악기의 연주가 없는, 극히 기초적 수준의 틀만 갖춘 농요나 구전민요들이 널리 불렸고, 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들이 한말개화기까지는 이 땅의 “대중가요”였다. “가요“라는 용어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대중음악에 국한된 용어는 아닌듯하고 이후 한말에 와서 ‘창가’, 일제 초기에는 “유행창가” 그 이후엔 “유행가”로 그 변천과정을 거쳐 1960년대 이후에 “대중가요” 또는 “가요”라는 용어가 정착하게 된다. 대중가요의 기원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기준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른 바 “현대적 작법에 따른 창작 곡”이라는 관점을 적용한다면 <낙화유수>*가 나온 1927년을 대중가요역사의 시작으로 치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우리 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경인철도회사에서 어제 개업예식을 거행하는데, 인천에서 화륜거가 떠나 삼개 건너 영등포로 와서 경성의 내외국인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에 실린 경인철도 개통관련 기사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6년 전 일이고, 경술국치를 당하기 11년 전 일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철도 개통은 세상이 떠들썩하게 자축해야할 크나큰 경사겠으나,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마냥 웃으며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구미 열강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극동의 작고 힘 없고 늙은,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서로 삼키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나라와 러시아,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이들은 조선지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지배와 대동아(大東亞)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경인철도 개통이 그 시발점이었다.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우리 인류는 출현의 역사가 가장 짧다.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으로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것이 대략 250만 년 전 일이고, 조금 느슨한 기준으로 라마피테쿠스를 인류의 조상으로 친다 하더라도 500만 년 정도이니 지구의 역사에서는 바로 조금 전 사건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과학발전은 선악을 떠나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 가운데 인류의 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게 바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발전일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수레의 발명과 말의 이용은 교통과 통신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 제정로마는 제국전역에 숙박 및 편의시설을 갖춘 역참을 설치하고 공영우편제도 실시하여 교통과 통신의 혁신을 가져왔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는 교통과 통신 분야도 암흑기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하기 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19세기 초 조지 스티븐슨이 개발한 증기기관차가 상용화에 성공하고, 반세기 뒤 그레이엄 벨이 전화라는 가공할 발명품을 들고 나와 우리 인류는 대변혁을 겪게 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