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미스터 김. 이 음반은 저의 가장 친한 친구 오빠의 첫 번째 앨범이에요. 제 마음을 담아 선물로 드리고 가니 즐겨 들으셨으면 해요. 그간의 후의에 감사드리고 정녕 이 공간을 잊지 못할 거 에요. 부디 안녕히 ㅡ알렉스> 그녀의 눈엔 이야기가 많았다. 채 서른도 안돼 보이는데도 눈 속 가득 잔잔한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니예! 주변 사람들은 그냥 "알렉스"라 불렀다. 석별의 선물을 내게 전하는 알렉스의 눈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보다 사연이 하나 더 보태져 있었다. 그녀가 우리 가게에 처음 온 날이 두어 해전 금요일 밤이었다. 서울 바닥에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카페가 널리고 널렸겠지만 나의 공간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이 제법 많았다. 금요일 밤이면 외국인들이 내국인보다 많을 정도였다. 그들은 들어올 땐 각자의 무리가 나뉘어 들어오지만 금 새 친숙해져 한 무리를 이루는 게 다반사였다. 그 가운데 총 두목(?) 격인 데이브(Dave)란 사내가 항상 분위기를주도 하였는데, 신참 강사가 오면 한국생활에 적응 하게끔 팔을 걷어붙이고 조언과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새 친구가 오면 나에게 소개 시키는 것도 그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저것 좀 보아요. 수양버들의 신명나는 춤사위를. 들리나요? 저 소리가.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보다 또렷이 다가오는 연두 빛의 소리가. 어느새 바위마다 이끼가 푸르러 녹색 융단을 덮어썼고, 생강나무 가지에는 노란 병아리 떼가 비를 맞고 떨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쯤 유리창에 그어지는 빗금들을 바라보며 시를 쓰거나 기타를 치며 내 생각을 하겠지요. 나는 이 그림, 한 폭의 파스텔화를 당신에게 전하며 개구리 자맥질하는 개울을 따라 산길을 걷습니다. 이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참꽃이며 산벚이며 개살구 꽃들이 앞 다투며 피어나 산허리를 가득 메울 테고 초록봉은 꽃 위로 두둥실 떠오르겠지요. 그때도 그랬습니다.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세상을 뒤덮던 화사한 봄날 이었습니다. 다시는 내 삶에 화폐의 소용가치가 없을 것 같기에 있는 돈 몽땅 털어서,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밤새 술이란 술은 죄다 퍼마시고 산사로 향했습니다. 산새들이 노래하고 산유화가 만발해도, 하늘엔 동화 같은 섬들이 도란도란 떠다녀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게 끔찍했고 꽃분홍 하늘을 보면 짜증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추억의 LP여행" 담당자께 봄비가 내렸나요? 남풍이 불던가요? 한강 물은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경칩이 코앞이니 한강 물이야 당연히 풀렸겠지요. 서녘 하늘에 꽃노을이 지던가요? 종달새가 날던가요? 그렇다면 봄이 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고국의 봄이. 봄비가 내립니다. 남풍도 불고요. 산허리까지 눈이 녹고 눈 녹은 물이 넘쳐 콜로라도 강으로 흘러들면, 그랜드 캐년의 석양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늑대의 외로운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면 이곳에도 봄이 오는 겁니다. 머나먼 이국의 봄이.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미국 땅 하고도 콜로라도로 떠나온 지가. 로키산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봄을 쬡니다. 아아, 보드런 햇살이 얼굴을 어르네요. 눈을 감습니다.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30년 전 이태원의 어느 클럽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 때도 봄날이었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 개나리 덤불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던 봄날이었습니다. 나라는 온통 올림픽 준비로 들떠 있었고 나 역시 오랜만의 외박에 들뜬 마음으로 부대 정문을 나섰습니다. "철학자 카투사"라 불리던 나는 그날도 왁자지껄한 동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밤이 짧아지고 있었다. 어느 샌가 휘파람새가 찾아와 오동나무 위에 앉아 밤마다 피리를 불었으나 하나도 아름답지가않았다. 벌써 신작로엔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보릿고개.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보릿고개만은 이곳에서 맞지 않으리라. 열여섯 이 꽃다운 청춘을 밭고랑에 파묻지 않으리라! 이제 곧 첫 닭이 울겠지. 새근새근 잠든 동생들을 뒤로하고 소리죽여 싸리문을 나섰다. 문 밖에는 분선이가 새파랗게 달빛에 젖은 채 서 있었다. 이 골 저 골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우리의 발자국 소리를 묻어주었다. 서낭당까지라도 배웅 하겠다는 분선이를 간신히 달래고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새벽길을 재촉했다. 눈물 따위는 시냇물에 떠내려 보냈다. 한숨도 떠내려 보냈다. 어제 장날, 한 달 내내 모은 달걀을 팔아서 벌은 지전 몇 장을 아버지 몰래 치마 춤에 꽂아주며 삼키던 엄마의 피 맺힘도, 아버지의 진가래 소리도 하얗게 떠내려 오는 산 벚 꽃잎 따라 흘려보냈다. 고생이 되더라도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애원하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던 분선아. 단짝동무 분선아. 네가 두드려 빠는 개짐* 꽃물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언젠가는 그녀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햇살이 포시럽게(포근하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어느 카페의 창가에 홀로 앉아,인도네시아 산 커피의 은은한 향을 음미하며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을 날이. 뒤안 감나무 옆에서 제비꽃이 파르르 떨리는 날, 기타를 둘러매고 아지랑이 아른 거리는 들판으로 달려갈 날이. 나 또한 그럴 것이다. 태백준령을 넘는 야간열차에 몸을 얹고 차창에 서린 성에를 입김으로 녹여가며 시를 쓸 날이. 퇴락한 도시의 한 귀퉁이 허름한 대폿집의 목로에 앉아, 흑백영화의 명장면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날이. 가끔은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며 혼자만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느낄 날이. 언젠가 우리가 이 땅에 부재(不在)할 날이 오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산벚 잎이 홍시 익듯 물들던 날, 갈대 홀씨가솜처럼 패어나고 으름 씨방이 터지던 날이었다. "그대의 향기가 나에겐 바람 같은 그리움 심장을 뛰게 하는 냄새 아무도 모르게 다가온 그대가 나에겐 사랑이더라.“ 지난밤의 치열한 과음으로 사막을 헤매고 있을 때 날아든 문자메시지였다.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듯 하얘졌다. 떡밥 파문에 놀라 흩어졌던 고기들이 다시 모이듯, 생각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하늘이 시리도록 파란 날이었다. 모기만한 물체가 비행운을 만들며 지나갈 뿐 티 없이 깨끗한 날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구름이 바다에 내려앉아 하얗게 밀려왔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한 자락 없는 날인데도 바람이 불어왔다. 영동선 기차가 유혈목이처럼 지나가며 만들어 놓은 바람이었다. 싫지가 않았다. 기차바퀴의 쇳내가 기도를 지나 폐에 닿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렇게 기차 흔적을 밟으며 철길을 걷고 있었다. 소리, 비릿한 갈조류 냄새에 얹혀 어디선가 끊어지듯 이어지듯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지남력(指南力,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한 내 발걸음은 자석에 빨려드는 쇳가루처럼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끌리어갔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뭐 좀 여쭈어 봐도...?” 노래가 들려온 곳은 하평 언덕이었다. 철길을 등 뒤에 두고 앉으면 오로지 쪽빛 바다와 갈매기 떼만 내려다보이는 곳, 차안과 피안의 경계였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 솜씨도 보통이 아니려니와 흥겨운 리듬의 노래를 부르는데도 목소리에 배어있는 가녀린 애조는 나의 호기심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던가.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시간이 나를 흐르게 한 것인가? 내가 시간을 예까지 끌고 온 것인가? 꿈처럼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월 따라 나도 흐르지만 다행히도 같이 흐르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 것이 바로 기억으로 책장에서 책을 꺼내듯 기억 한 권을 꺼내어 펼쳐 본다. 그땐 그랬었다. 세상이 내 것 인양, 내가 최고 인양 설치던 시절. 오만방자함을 겸손으로 감추던 시절. 머잖아 불혹이 온다는 초조함에 이루고 싶은 것도 많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지금 와 생각해 봐도 제법 그럴싸한 낭만 한 타래를 엮는다. 보헤미안! 어린 시절엔 장돌뱅이들이 부럽더니, 머리가 좀 굵어지면서 나는 늘 집시들의 삶을 동경했었다. 누가 나에게 역마살이 끼었다 말하면 왠지 기분이 좋았고,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곤했다. 마음 같아선 주유천하 하면서 살고 싶었으나 민생고 해결이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마음과 현실이 동 떨어진 생활을 하던 중년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나는 꿈과 현실을 동시에 해결할 묘책 하나를 떠올린다. 그 묘책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져 먼저 중고차 매장으로 달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그해 단풍은 유난히 고왔다. 당단풍이며 고로쇠, 산사나무 잎엔 잡티 하나 없었다. 언론에선 관측 이래 가장 단풍이 고운 해라며 호들갑을 떨던 그 가을에 나는 소중한 기억 한 편을 짓게 된다. “한터라는 곳으로 가는데요. 사형 한 분이 수행하는 움막이 있다하여...” 국도에서 갈라져 40여분을 덜컹거린 끝에 시골버스는 우리를 왕산골 종점에다 짐짝처럼 부려 놓았다. 시간은 아직 한낮이지만 늦가을 해는 잰걸음으로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터라, 서둘러도 해 전에는 들어가기 어렵겠는데요. 스님, 먼 길이니 일단 요기부터 하십시다. “ 우리는 점방 쪽마루에 걸터앉아 라면에다 식은 밥을 말아 태백준령을 넘을 힘을 비축했다. 라면을 먹으면서 나는 초면임도 잊은 채 언제 출가를 했느냐, 어느 절에서 입문 했느냐, 은사스님은 누구냐는 등 시시콜콜한 질문들로 고요를 깨웠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해 보이는 그였으나 속인의 부질없는 물음에 이름 모를 산새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서둘러 전방을 떠나긴 했으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 그림자가 가로로 눕기 시작했다. “남들은 겨울이 무서워 시내로 내려가는데 저는 무엇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멀리 떠납니다. 부디 행복하시길>단 두 마디 밖에 쓸 수 없었다. 아홉 해라는 세월을 어찌 다 쓸 수 있으랴. 영상이 흘렀다. 그녀 집안의 무조건적이며 집요한 반대. 노숙자 행색으로 낯 선 거리를 떠돌던 도피행각. 친척집이란 친척집은 죄다 돌며 두 육신 깃들 곳을 찾아 헤매던 날들. 열 개나 되던 그녀 오빠들의 거친 팔. 그 완력에 몸은 둘로 나뉘었어도 끝내 놓지 않았던 손, 손. 무모했으나 빙어 속 같이 맑고 시린 사랑.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다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이런 것인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쪽지를 써서 그녀의 옷 보따리 위에 올려놓기는 했으나 선뜻 방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쇠가 제 몸에서 이는 녹으로 사그러지듯 이렇게 우리 스스로 허물어지고 마는 것인가. 그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건만... 문틈 사이로 회한이 밀려들어왔다. 내가 알고 있는 글씨 가운데 기쁨이라든가 환희, 행복 같은 단어들은 모두 지워지고 상처, 아픔, 방랑 같은 단어들만 또렷이 살아났다. “윙윙, 어디로 간다고?” “어디 정해진 곳은 없고요. 윙윙,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드릴게요. 윙윙” 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참으로 오랜만에 자네에게 편지를 쓰는군. 아니, 자네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던 기억조차 아스라하군. 아무리 기계문명이 세상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인본 위주의 가치관만은 버리지 말자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어느 바람에 우리의 다짐을 날려 보냈는지. 노장사상을 논하고, 헤르만 헤세와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논하고 헤겔, 프로이트를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를 혀에 올려놓고 밤을 새운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어느 물길에 우리의 그 순수함을 떠내려 보냈는지... 며칠 전 아내와 용문사를 다녀왔다네. 벌써 거목은행나무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더군. 둘이 양 팔을 펼쳐 거목의 둘레를 잴 때 아내의 웃는 모습이 자네 얼굴과 오버랩 되었네. 그게 그러니까... 오, 벌써 30년도 넘었군 그래. 자네와 내가 그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게. 우리는 새로운 체험에 한껏 부풀어 밤을 꼬박 새웠지. 그 때 참여했던 새벽예불의 경험은 아직도 명화의 한 장면으로 나에게 돋을새김으로 남아있다네. 막 솟아오른 태양이 새벽안개를 몰아낼 때 은행잎을 모아 시루떡처럼 쌓아 올리는 한 젊은 스님의 평온한 표정에서 우리는 무심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