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침침했다. 전등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리라 예상 하면서도 ‘공사중’이란 간판에 이끌리어 내려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출입문은 잠겨 있었으나 내부 불빛이 문에 난 쪽창으로 새어 나왔다. 호기심을 못 이겨 체면은 일단 접어두고 문을 두드렸다. 몇 번 두드리니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쪽창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문을 열었다. “저, 아직…” “압니다. 지나가다가 가게이름이 하도 독특해 들어와 봤습니다. 먼저 한 번 둘러보고 저녁때 오려고요.” 가게 안은 과연 공사 중이었다. 여기저기 벽돌과 블록조각들이 널브러지고 벽면도 바르다만 상태였다. 구석에는 시멘트도 몇 포대 쌓여 있었다. 그 상태로 공사를 마치고 이미 개업을 하였지만 ‘공사중’이라는 진행형에서 진지함이 읽혀져 좋았다. 조명이 밝은 무대에선 사내의 아내로 보이는 한 여인이 옷감을 펼쳐놓고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작업복 만드시나보죠?” “아니요, 무대복 겸 평상복 겸 외출복이에요.” 그녀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도 손수 지은 것이라 했다. 나는 그녀의 바느질 솜씨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며 너스레를 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목이 메어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 따라 가버렸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 쳐봐도 재회의 기약 없이 가버린 그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얼마 전 40년 만에 동두천을 다녀왔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옛 모습을 잃은 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그나마 변하지 않고 있는 개울과 역 광장을 토대로 옛 모습을 그려 보았다. 미군 제2사단이 있던 자리며 개천을 따라 늘어선 기지촌자리, 자취방이 있던 생연리…. 본토음악 배우겠다고 전국의 기지촌을 떠돌던 시절, 동두천읍 보산리는 기지촌의 대명사이자 8군무대의 대명사였다. 오늘은 기지촌과 8군무대를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워본다. 일반적으로 기지촌에 있는 클럽과 8군무대를 같은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둘 사이엔 엄연히 경계가 있다. 8군무대는 부대에 부속된 클럽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교들이 출입하는 officers 클럽, 하사관들을 위한 NCO 클럽, 사병들이 이용하는 EM클럽이 있었다. 8군무대에 서기 위해선 미 국방성에서 파견한 심사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함께 가는 인생길에서 우린 즐거웠지요 꿈 많던 젊은 시절은 아름다웠고요 당신이 가고 난 뒤 인생도 따라 가겠지요 우리가 부르던 옛 노래처럼 내가 나이 들어 꿈조차 꿀 수 없을 때 당신 모습 떠올리겠어요 내가 나이 들어 꿈조차 꿀 수 없을 때에도 그 모습 내 맘속에 살아 있으리니 그러니 내 사랑, 키스해 줘요 그리고 우리 작별하기로 해요 내가 나이 들어 꿈조차 꿀 수 없을 때에도 그 입맞춤 내 맘속에 남아 있으리니 “아우님 이리와 인사드리시게.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야.” 계절은 아직 여름 끝에서 어물쩍 거리는데 마음만 저만치 앞질러 가버린 탓에 종일 우수에 젖던 그날, 소중한 인연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멋쟁이 형님이셔 아우 생각이 나서 모시고 왔지.” 오랜만에 만나는 동균 형이었다. 그동안 KBO 일이 바빠 못 와 미안하다며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린 뒤 한 노신사를 소개했다. 몸매는 가냘프나 악수를 청하는 노신사의 눈빛에서 우리의 인연이 오래 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60년대 학번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들만 골라 들려줬고 우리는 다른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김삿갓’[김병연, 金炳淵]은 삿갓을 지붕삼아 대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세월에 몸을 맡겼다. 비록 세상을 등지고 주유천하 하는 몸이라고는 하나 어찌 애틋한 사랑 하나 없었겠는가? 그에게도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 아리게 하는 애달픈 사랑얘기가 전해오니 바로 기생 가련(可憐)과의 사랑이다. 김삿갓이 금강산 일대를 유람할 때 하룻밤 묵은 불영암에서 그 인연이 시작된다. 암자의 주지 공허는 밤이 되자 심심했는지 김삿갓에게 시(詩)짓기 내기를 청하며, 지는 사람은 이(齒)를 뽑자는 조건을 내걸었다. 내기 치고는 좀 과하다고는 느꼈으나 시 짓기 내기를 마다할 김삿갓이 아니었고 결과는 당연했다. 내기에 진 노승은 김삿갓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입에 넣어 이를 뽑아 주었다. 그리고는 “함흥 땅에 가시거든 ‘가련’이라는 기생을 꼭 찾아보시오”하는 것이었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부부의 연은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연인들 가운데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한 채 가슴 아픈 이별을 하는 쌍들도 많다. 사실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각기 다르게 형성된 성격을 맞추어 간다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인가?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기에 헤어짐도 어려웠지만, 요즘은 만나기가 쉬워진 탓인지 헤어짐도 쉬운 것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剛愎)해진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의 사고와 가치관이 자신과 다르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고 융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기와 독선이 남녀관계라고 다를 바 없어 상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결별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개인의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에는 그래도 마음에 상처가 덜 남는다. 둘 사이의 마음이 잘 맞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라 할지라도, 부부의 연이 닿질 않아 아픈 이별을 해야 하는 연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 경우엔 평생 쓰라림을 달래며 살아가야 한다. 전생에서 수백 번의 인연을 쌓아야 부부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우리 발밑에는 지옥이 없고 위에는 창공만 있겠죠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나라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죽일 일도 죽일 필요도 없어요 종교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겠죠 나를 몽상가라할지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도 우리와 함께해요 세계는 하나가 될테니까 재물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탐욕도 굶주림도 없겠죠 오직 인류애만 있고 세계는 하나가 될테니까 - 존 레논 ‘이메진’ 중에서 태국의 어느 난민 수용소.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조국 캄보디아를 탈출한 디스 프란과 그의 미국인 친구 시드니 쉔버그가 감격의 포옹을 한다. 그때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존 레논의 목소리가 영혼을 울리며 영화 킬링필드는 159분의 끝을 맞는다. 롤랑 조페 감독의 1985년 작 킬링필드는 전쟁과 이념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되는 집단학살과 인권 유린, 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가치마저 짓밟히는 참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화제작이다. 《뉴욕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는 캄보디아 내전 당시 미국 공군의 오폭사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H- 그녀는 80노파다. 초근목피를 해야 할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자식 없는 집에 양녀로 들어갔다. 성품이 표독스런 양어머니는 굶기기와 매질, 혹사로 어린 딸을 학대했다. 그래도 잡초처럼 강인한 근성을 물려받은 그녀는 용케도 살아남아 스무 살 되던 해에 시집을 갔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고 신랑도 인물이 훤칠하여 복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과부 시어머니의 지독한 술주정과 아편쟁이 남편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주색과 아편에 빠져 살던 남편은 돈 떨어지면 내려와 돈 내놓으라며 몽둥이질을 해댔다. 어느 해, 해가 바뀌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서며 그녀는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정조교육이라곤 받아 본적이 없기에 남자들의 유혹을 죄다 받아들였다. 그러다보면 팔자가 고쳐질 줄 알았다. 열 번도 넘게 시집을 갔다. 그 가운데는 정말 팔자를 고칠 뻔한 남자도 몇은 있었다. 그러나 잡초처럼 강인한 그녀의 생명력만큼 고집도 억셌다. 결국 남아있는 남자는 한 명도 없다. S-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다. 돌팔이 약장수 아버지를 둔 덕택에 돈 걱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역사시대 이래 남성들은 부권중심제의 울타리 안에서 여성에 견주어 많은 특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우리 인류의 가계(家系)가 모계에서 부계로 바뀐 데는 국가권력의 탄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소규모 전투시대에서 대규모 전쟁시대로 넘어올 때쯤으로 짐작된다. 부족국가나 읍락국가에 견주어 남성들의 물리력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없겠으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권익이 과거 보다는 많이 향상된 것 같다. 그리 멀리 소급할 필요도 없이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존여비사상의 희생물이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밥 짓는 일을 시작으로 농사일과 가사에 허리가 휘도록 내몰렸다.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찬물에다 빨래를 한다거나 다듬이질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남편을 잘 만난 여인네는 마음고생이나마 덜 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남정네들은 그릇된 사회통념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식솔들은 배를 곯아도 자기 술 배는 채우고 다녔고 걸핏하면 술주정에다 험악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00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아침안개에 먼 산이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긴급 공지 본 협회 이종환 고문 오늘 새벽 1시 별세. 박원웅 부회장 인솔 하에 단체조문 예정. 연락바람’ 몇 달 전 부회장직 반납의사를 전해 왔을 때 이상한 예감이 들긴 하였으나,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으니 머잖아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박원웅 신임 부회장의 전언을 우리 ‘한국 방송 디스크자키 협회’회원들 대부분은 믿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이종환 고문의 부음을 접하고 나니 우리 DJ계의 양축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상실감이 밀려왔다. 중년세대치고 이종환의 목소리 안 들어본 이 누가 있으랴? 저 넓디넓은 우주어디엔가 우리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별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곳의 초청을 받았으리라는 자위로 허탈감을 메우며 대선배의 명복을 빌어본다. 오늘은 남성듀엣 ‘쉐그린’이 ‘노래 꽃 피는 마을’을 방문하였다. 이종환은 신인가수 특히 통기타가수 발굴에도 대단한 열정을 보였는데 그가 운영하던 통기타살롱 ‘쉘부르’가 바로 그 산실이었다. 종로에서 시작하여 훗날 명동에 둥지를 튼 ‘쉘부르’는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장밋빛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은 갈망이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바닷물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었다. 무언가 저지르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았다. 옆집으로 달려가 방위병 형에게 가발과 양복을 빌렸다. 시장에서 중고구두도 한 켤레 사 신고 건들건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궁둥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이 그날은 먼 산에서 날아오는 밤꽃 향기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가장 음악이 ‘쎄다’는 다방에 들어섰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곳이었다. 침이 마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옆집 방위병 형이 알려준 대로 커피를 한잔 시키고 신청곡도 적어 보냈다. 몇 곡의 노래가 흘러갔을 즈음 긴장이 풀리고 나니 음악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감동이 밀려왔다. 매일 ‘야외전축’으로만 듣던 모기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외제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진동이 가슴을 때렸다. 아까부터 옆 테이블에 있는 아가씨의 시선이 내 볼에 꽃이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신청곡 적기에 바빴다. “저,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수줍은 듯 들려오는 가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