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부산진일신여학교(이하 ‘일신여학교’)의 3・1운동을 도운 호주 선교사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2022년 애족장), 이사벨라 멘지스(2022년 건국포장), 데이지 호킹(2022년 건국포장)을 <2024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1919년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부산ㆍ마산 지역에 전달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들은 부산 학생대표들을 만나 만세 시위를 촉구했다. 이에 따라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3월 11일 저녁,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펼쳤다. 호주 빅토리아주 출생(1887년)의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는 1910년 호주 선교사로 부산에 파견, 일신여학교 교무주임을 지내다 1914년부터 교장을 맡았다. 또한, 1919년 3월 11일 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참여해 학생 인솔 및 보호에 앞장서다 일제에 의해 체포된 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40년대에는 일제가 기독교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학교를 경영하지 않겠다’라는 호주 장로회의 방침에 동의하면서 일신여학교가 폐교되자 호주로 귀환했다. 호주 빅토리아주 출생(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발행인] 지난 12월 29일 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고 발표했다. 보훈부는 "이승만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한인자유대회 개최와 한미협회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라고 꼽은 까닭을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보훈부의 발표에 고개를 끄떡일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정말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뛰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국민을 버린 이승만이 웬 국부? 이렇게 보훈부가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은 데는 보훈부의 전 장관과 현 장관의 ‘이승만은 국부’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난해 8월 11일 한국일보의 기사에 보면 당시 박민식 장관이 "이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럴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공이 90%, 과가 10%라고 본다. 우상화라는 표현은 합당치 않다."라고 말하면서 이승만을 국부로 치켜세웠다. 하지만, 국민이 박 전 장관의 이런 생각에 손뼉을 쳐줄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기사에 댓글을 단 많은 누리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받았으며, 4·19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재명 의사는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겨레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14년 전 오늘(1909년 12월 22일) 낮 11시 30분경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허리를 찌르고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찔렀지요.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목숨을 건져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지요. 이재명 의사는 1910년 봄 공판장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였으며, 일본인 재판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심문에 이천만 조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중일전쟁 이후 학생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간, 서상교(1963년 독립장), 최낙철(1963년 독립장), 신기철(1990년 애족장) 선생을〈2023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라고 밝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언론ㆍ집회ㆍ출판ㆍ결사가 금지되었으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모진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학생독립운동 인물이 서상교ㆍ최낙철ㆍ신기철 선생이었다. 대구 출생의 서상교(1923년) 선생은 대구상업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5월, 김상길ㆍ이상호와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태극단’을 조직,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학술 연구, 체력 향상 등의 활동에 나서는 한편, 군사학에도 관심을 두고 관련 서적의 번역, 폭발물 제조에 관해서도 연구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밀고로 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견되어 서상교 선생을 비롯한 26명의 단원 모두가 체포되면서 태극단은 와해 되었다. 선생은 1944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일본제국의 국시[國是]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친일파 처단 등 의열활동을 펼친 독립유공자, 이종암(1962년 독립장), 이강훈(1977년 독립장), 엄순봉(1963년 독립장) 선생을 〈2023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대구광역시 출생의 이종암(1896년) 선생은 1918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속성과정을 거쳐 1919년 10월 수료했고, 동창생들과 의기투합하여 의열단*을 11월에 창립했다. *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로써 1920년대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을 펼침 선생은 국내로 밀입국해 최수봉(崔壽鳳, 호적명 최경학, 1963년 독립장)을 만나 폭탄 거사를 제의, 최수봉이 12월 27일 밀양경찰서로 진입해 거사를 성공시킨 뒤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북경의 의열단 본부에 합류했다. 또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경신참변 당시 육군대신)가 상해를 방문한 1922년 3월 28일,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의 다나카 암살 거사에 참여했으나 실패한 뒤 탈출했다. 선생은 의열단 조직정비 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유공자, 이재현(1963년 독립장), 한형석(1990년 애국장), 송면수(1992년 애국장) 선생을〈2023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라고 밝혔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세 분의 선생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하다가 광복군이 창설되자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이어 제2지대로 편입하여 활동했다. * 1939년 11월에 창설되어 항일전투에 참여하고, 초모(招募) 공작활동을 벌였다. 1941년 1월 1일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제5지대로 재편되었다. 경기도 시흥 출생인 이재현(1917년생) 선생은 1919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이후 상해소년동맹,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1941년 전지공작대를 비롯해 광복군 공작대 행동대장으로 활약하였고, 1944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로 배속되어 정훈을 담당하며 ‘제2지대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부산 동래 출신의 한형석(1910년생)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30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부민관에 폭탄을 터뜨린 독립유공자, 강윤국(1990년 애국장), 유만수(1990년 애국장) 선생을 〈202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라고 밝혔다. 부민관폭탄의거는 1945년 7월 24일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선생 등 대한애국청년당 소속인 세 분이 일본 침략전쟁 동원행사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 행사장인 부민관(현재의 서울시의회)에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 * 1945년 7월 24일 박춘금 등 친일 세력이 한국인을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개최한 어용집회(御用集會) 서울 출생인 강윤국(1926년) 선생과 경기 안성 출신의 유만수(1921년) 선생은 가와사키(川崎) 일본강관주식회사 공장에서 노동자로 만나 일본인들이 한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농성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선생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 의기투합해 1945년 5월 일본강관주식회사 동료들과 친일 거두(巨頭)와 침략 원흉(元兇) 처단을 위해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박춘금 주최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하와이 이민 도착 120돌을 맞아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독립운동을 이끈 안현경(1995년 독립장)ㆍ이원순 선생(1991년 애국장)을 <2023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라고 밝혔다. 서울 출생(1881년)의 안현경 선생은 1905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응모하여 같은 해 5월 하와이에 도착했다. 선생은 1909년 4월 오아후(Oahu)섬의 와히아와(Wahiawa)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히아와지방회 회장으로 뽑혔고, 1910년 7월 하와이 지방대표들과 함께 일왕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ㆍ강점에 항의하는 전보문을 발송하였다. 1913년 2월,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하여 출판, 종교 및 교육사업을 펼치자 이승만을 도와 1913년 9월 국문잡지인 《태평양잡지》와 1914년 4월 ‘한인교회보’발행, 1916년 11월 하와이 정부에 등록된 한인여학원 이사, 1918년 한인사회 자치교회인 ‘한인기독교회 선교부 이사원(재무)’ 등을 맡아 한인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 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는 22일 오전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지부장 이길호)에서 ‘서울출신 3·1독립만세의거 미포상자(학생) 발굴, 포상신청 현황 보고회’를 열었다. 이날 보고회는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가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회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서울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미포상자(당시 학생)를 발굴하여 포상을 신청하는 연구였다. 이번에 발굴해 포상 신청한 미포상 독립운동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3년생 강학룡(姜學龍)·백인제(白麟濟) 등 61명으로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부(서울) 탑골공원·광화문 등지에서 수만 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돼 1919년 8월 4일 예심을 거쳐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8월 실형이나 집행유예 3년이 선고돼 학업이 중단되고,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고초를 겪은 학생 출신 독립유공자들이다. 보고회에서는 먼저 61인의 발굴 과정에 참여한 이윤옥·전영복 박사, 임동한 연구원의 설명에 이어 공적 개요를 이태룡 소장이 보고했다.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 이길호 지부장은 “일제의 강탈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깊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재환 선생의 정부포상 받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윤재환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2021.8.5.- 이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열흘 앞둔 8월 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윤재환(尹載煥, 1918~1938, 20세로 순국) 의사(義士)에 관한 ‘포상안내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포상안내문을 받아든 팔순의 장조카 윤용택 (82)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피어보지도 못한 약관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버린 비련의 독립운동가 백부(큰아버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온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윤재환 의사는 1934년 3∼4월 경기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학생조직인 AM회 내지 서남회(일명 소나무회) 학생 반원으로 회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이라고 간략히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