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운하 명인이 그의 풍물인생 60돌을 기린 공연에서 남사당의 후배 명인들과 국악계의 유명 국악인들, 그리고 남사당놀이 <인천시지회>와 사물놀이 <진쇠>, <평택농악 보존회> 등이 출연하여 관객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당시 인천의 <대성목재>라는 목재회사에서 특별히 장려해 오고 있던 농악단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지운하의 고향, 인천 도화동에는 마을 풍물패가 있었는데, 여기서 상쇠를 도맡던 사람이 다름 아닌 지운하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운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풍물을 접하게 되었고, 소년 시절에 이미 도화동 풍물패의 단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기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풍물패가 있었고, 그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은 그렇게 전문가의 능력을 필요하거나, 또는 전문가적인 실력을 운운할 것까지는 아니나, 어느 정도 그들과 농악을 함께 칠 수 있을 정도의 호흡은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앞길은 이미 예견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과거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과 평택, 충남 당진, 대전시 대덕, 전남 강진과 구례, 경남 진주와 남해, 황해도의 송화와 은율 등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대부분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시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연희의 판이 성공될 확률이 높았던 곳이었다. 지난주에는 남사당의 제6종목 <인형극> 곧 <덜미>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지운하 명인 어떻게 풍물굿을 배우게 됐는지 얘기를 해 보려 한다. <남사당놀이>의 주 내용은 지배층 구조에 항의하거나, 그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종목은 1964년도에 처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남사당의 나머지 5종목 모두를 갖추게 되면서 그 이름도 <남사당놀이>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35여 년이 지난 현재, 이곳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새로운 남사당 예인들의 발굴이나 젊은 예인들의 양성 사업이 활발치 못해서 점점 침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음악계나 춤, 연희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이어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남사당놀이는 1964년, <인형극>이란 이름으로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고, 1988년에는 6종목이 포함되어 <남사당놀이>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올랐으나, 현재는 그 전승이 활발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였다. 다행스럽게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운하, 남기문 등이 <인천 남사당놀이보존회>를 설립하였고, 특히 제26회 부평풍물축제에서 6종목 전 과정을 선보였는데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대단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첫 번째 종목인 <풍물놀이>는 판굿, 그리고 다양한 개인놀음이 일품이다. 특히 남사당패 풍물놀이의 개인놀음은 각 악기의 연주력이 돋보이는 대목으로 지역적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풍물을 구성하고 있는 면모를 보면 소리가 크고 강렬한 꽹과리(小金)를 비롯하여 징(大金), 장고(杖鼓), 북(鼓), 소고(小鼓), 무동(舞童), 호적(胡笛), 기수(旗手), 잡색(雜色) 등이 편성되는데, 그 바탕은 경기지방과 충청지방의 풍물놀이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이다. 참고로 남사당패의 조직은 어떠한가? 하는 점을 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