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일제강점기 가무연구회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의 이야기로 한성권번에서 잡가 선생을 지낸 유개동을 소개하였다. 그는 1960년대 말, 산타령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김태봉, 이창배, 정득만, 김순태와 함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던 5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 12잡가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할 정도로 가사의 암기며 사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는 점을 얘기했다.
특히 서도창으로 수심가를 두드러지게 잘 불렀으며 그 지역 명창 못지않게 독특한 서도의 목을 잘 묘사하였다는 점, 서울 경기의 12잡가 중에는 방물가(房物歌)를 잘 불렀던 명창이었다는 점, 방물이란 여자들의 소용인 패물이라든가 잡화를 말하며 노래 가사에는 방물을 열거하나 속뜻은 남녀의 사랑이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 이 노래는 과거 8잡가에 포함되지 못하고 잡잡가에 속해 있던 노래였다는 점도 거론했다.
또 과거에는 기생의 양성은 주로 권번(券番)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일제 말기에는 기생조합이었고, 한성권번에서는 가곡, 가사, 시조에 경기잡가, 서도잡가, 민요, 정재무, 묵화 등 다채로운 과목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가곡의 장계춘, 가사와 시조에 조영호, 그리고 경기잡가와 서도잡가의 선생이 바로 유개동이었으며 그 시절 유개동의 제자로는 장채선을 비롯하여 이비봉, 최명월, 주학선, 한난홍 등이란 점, 그 후, 가곡의 명인 하규일이 조선권번을 세우고 학감(學監)이 되어 가곡, 가사, 시조를 가르쳤고, 민요나 잡가는 앞에서 이야기 한 최정식이 가르쳤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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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년판 "조선명인백인"에 당당하게 들어 있는 이화중선 명창이 기생으로 소개되어 있다. |
권번에 관한 이야기는 속풀이에서 몇 차례 이야기 한 바가 있다. 원래 권번(券番)이라 하는 곳은 어린 여자 아이들, 즉 어린 기녀 후보자(童妓)들에게 노래나 악기, 춤 등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조직이었다. 조직이 잘 되어있던 평양의 기성권번 같은 곳은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 온 학교와 같은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 예비기녀들은 노래와 춤과 같은 기능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책도 읽고 시도 지으며 그림도 그리고, 언어 공부도 해서 매우 유식한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적인 권번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의 권번은 상업적으로 흘러 과거의 이미지를 많이 흐려놓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장계춘이나 조영호, 유개동 등이 소리를 지도하던 <한성권번>이 있었고, 하규일과 최정식 등이 지도하던 <조선권번>이 있었는데, 그 후 전성욱이란 사람이 낙원동에 <종로권번>을 세우면서 기존의 권번은 점차 세가 약해지다가 후에는 한성, 조선, 종로가 당국에 의해 합병되어 <삼화권번>이란 이름으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 질 무렵 조선총독부는 권번을 폐쇄해 버렸다.
권번이 해체되기 이전에는 이들 기녀 후보자들에게 가무를 지도하는 선생이 따로 있었고, 노래나 춤 반주를 해주던 악사도 필요했던 까닭에 민속음악이나 춤의 온상 역할을 한 곳이 곧 권번이라는 인식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가(認可)가 있는 권번에서는 예기들을 지도하는 선생이 따로 있었으나 당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전부 권번에서 지도할 수 있도록 기회가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권번의 소리선생으로 나가지 않는 명창들은 자기의 집이나 혹은 넓은 장소를 빌려 개인 교습소를 차려놓고 소리며 춤을 가르쳤다.
사설교습소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관청의 허가가 있는 권번으로 등록을 하여야 예기(藝妓)의 허가장을 받을 수 있고, 이러한 허가장이 있어야 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소리깨나 한다는 어린 여자아이들은 모두 권번을 문을 두드려 온 것이다. 아무리 사설교습소에서 소리를 잘 배웠다고 해도, 교습소에서는 직접 허가장을 받을 수 없도록 제도가 되어 있어서 권번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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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잡지 <모던조선과 일본> 1940년판 "기생의 하루"에는 경성기생 윤단심을 소개하면서 기생의 악기는 장구라 했다. |
당시 이름난 사설학원이나 교습소의 운영자로는 노래와 재담의 일인자로 활약하던 박춘재나 장고 잘치고 호적 잘 불던 김경호 등이 마포에 교습소를 세워 사사롭게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신촌의 김창연, 현저동의 박윤병 등이 비교적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잡가나 민요, 산타령 등을 지도한 유명한 명창들은 주로 지금의 성동구인 신당동이나 왕십리 부근에 운집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벽파 이창배의 스승이었던 산타령 왕십리패의 모갑이, 이명길이다. 그는 신당동에서 100여명의 제자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 근처에 살았던 엄태영도 100명 여명의 제자를 두고 있었다고 하며, 오성렬 또한 신당동에서 가르쳤다.
산타령의 최초 예능보유자였던 김태봉 역시 상왕십리에서 사설학원을 운영하였고, 탁복만도 하왕십리에서 사설 교습소를 세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온 것으로 유명하다. 가무연구회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회원들 중에는 각각 개인 사설학원을 세우고 낮에는 주로 어린 여자 아이들이나 일반인들을 위해 개인 교습을 하고, 저녁시간에는 최경식이 이끄는 동 연구회에 나와서 사업을 계획하고 발표회도 준비해 온 것이다.
이들 이외에 개인 교습소를 세워 각각의 예능을 전수해 온 사람들로는 잡가와 민요의 김태운이나 이명산이 있고, 고전무용을 가르치던 이칠성도 있으며 용산의 효창동에서 지도하던 최석조, 이태원에서 활약하던 성수근도 동 연구회의 주요멤버들이었다.
그리고 만주나 청진 등을 전전하며 제자들을 길러낸 김병구도 있고, 내수동의 이만흥이나 사직동의 김종수, 또는 돈암동의 김두식, 예지동의 오봉식, 궁술에 능하면서 광희동에서 민요와 잡가를 가르치던 이현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와룡동에서 교습하던 강흥태와 그의 아우 강흥식 형제도 있고, 익선동의 홍병호 등등이 동 연구회의 주요회원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제일 젊은 나이로 입회한 정득만과 이창배 등도 동 연구회의 회원이어서 가무연구회가 일제강점기 말에 경서도소리를 힘들게 지켜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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