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 “가을비 우산 속”

  • 등록 2015.09.13 06:55:19
크게보기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54] 우연한 만남, 운명같은 재회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잠 못 이루는 영혼들의 다정한 벗 DJ께. 

DJ께서 들려주시는 흘러간 노래들을 들으니 옛사랑이 생각나 이 사연을 띄웁니다. 

젊음의 싱그런 내음이 백양로를 가득 메운 우리 학교의 축제기간이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학우들이 모두 축제장으로 나가고 없는 텅 빈 도서관에서 창백한 얼굴로 아침부터 법전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지났는지 허기가 느껴진 나는 학생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문리대 앞을 막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요란한 함성이 들려와 발길을 옮기니 배구시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간호대학과 음악대학간의 여자부 시합이었습니다. 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구경을 하고 있는데 코트안의 열여덟 명선수 가운데 유난히 내 눈길을 끄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키도 그리 크지 않은데다 실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판단해서인지 후위 수비수를 맡고 있었습니다. 상대편 선수들은 그녀를 타깃으로 정해 집중적으로 그녀에게 서브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관중들은 그녀가 공을 못 받을 때마다 박장대소했고 그녀는 속이 상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습니다. 결국 간호대의 전략이 주효해서 그녀가 속한 음대가 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고 예비지성들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던 축제도 곧 끝이 났고, 그 뒤 몇 장의 달력이 찢겨나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도서관을 지키다 버스정류장으로 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 최헌 ‘가을비 우산 속’ 수록 음반 표지
그때 그 여학생. 배구시합에 나왔던 그 여학생이 거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로 가는 버스를 그냥 지나보내고 그녀가 타는 버스를 따라 탔습니다. 그녀가 내리는 곳에 같이 내려서 뒤따라갔습니다. 누군가 뒤따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녀는 달음질 쳐 집으로 들어가 버렸고 헛물만 켠 나는 그 다음날부터 음대에 가 살다시피 하면서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그녀로부터 데이트 약속을 받아 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처음만난 우리는 몇 마디 대화도 나누기 전에 서로에게 끌렸고 헤어지기가 못내 서운하여 우산을 쓰고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덕수궁 돌담길에 접어들어 있었고 돌담길을 한 바퀴 돈 뒤에도 모자라 그녀의 집 앞까지 다시 걸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하루라도 안보면 못 배길 정도가 되었고 데이트의 마지막은 늘 걸어서 서로의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다가 통금시간을 넘겨 파출소에서 밤을 새울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고 저녁 8시 이전까지 귀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명령을 어기고 말았고 결국에는 삭발과 함께 금족령이 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매일 그녀의 집 주위를 배회하였고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오빠를 붙들고 애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위관료인 자기네 가문에 강원도 산골출신의 가난뱅이가 사위로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며칠 뒤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우리는 마침내 입은 차림 그대로 도피 길에 올랐습니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ccrksa@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