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동녘에 해뜰 때 어머님 날 낳으시고
▲ 장계현 음반 표지
귀엽던 아가야 내 인생 시작 됐네
열두 살 시절엔 꿈 있어 좋았네
샛별의 눈동자로 별을 헤던 시절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 했네
너밖에 몰랐고 너만을 그리며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던 밀어
그러나 둘이는 마음이 변해서
서로가 냉정하게 토라져 버렸네
새파란 하늘처럼 그렇게 살리라
앞날을 생각하며 인생을 생각 하리
“벽면을 빼곡히 채운 LP판을 보니 제가 처음 음악다방에 갔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대학생이던 저의 형은 음악다방과 생맥주집 구경을 고교 졸업선물로 제게 주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며 듣고 싶습니다.”
민생고를 덜어보려고 음악카페를 할 때였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들어온 한 중년이 일만 장이 넘는 음반에 넋을 빼앗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한참 만에 신청곡 쪽지를 보내왔다.
‘그래, 한때는 매일 전파를 탈 만큼 인기가 좋았었지.’
신청곡이 나가는 동안 나 역시 그 시절 추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가 처음 다방에 갔을 때 커피 값이 30원이었던가? 50원이었던가? 자장면이 35원 이었으니까 50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목욕요금, 이발요금 같은 대중 물가를 정부에서 통제하던 시절이었지. 정부미도 귀하던 시절, 막걸리도 밀가루로만 만들게 했었지. 양담배를 팔다가 들키면 처벌을 받아야했고, 테니스라켓을 가방에 꼽고 다니면 부잣집 자녀였지. 라면 한 봉지에 20원이었으니까 다른 물가에 비해 덜 오른 건지 그때 턱없이 비쌌던 건지….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안 오른 건 공중전화요금일거야. 5원이었으니까 10배밖엔 안 오른 거지….’
“사장님 노래 끝나요!”
아주 잠깐 옛 생각에 잠긴 사이 벌써 <나의 20년>이 끝나고 다음 곡이 나오고 있었다.
‘젊어서는 꿈을 먹고 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 누가 만든 말인지 천하의 명언이라 생각하며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난다.
‘개똥이’ 장계현은 1950년 서울의 한 복판 종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교육열이 남달라 만 5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고교졸업 때까지 그는 항상 최연소 학생이었다.
장계현은 총명하여 다른 공부는 잘했으나 음악소질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림에 재능을 보여 대광 중·고 시절에는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그런 그에게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찾아온다.
고교 2학년 때 ‘The young ones’라는 영화에 출연한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그는 기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하자마자 학교밴드인 홍익캄보에 베이스주자로 입단했다. 그 뒤 그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활개를 치고 다녔다. 경희대생 김세환과 듀엣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윤항기의 ‘키 브라더스’에 합류하기도 했다. 거기서 드러머 유상봉을 만나 ‘템페스트’를 결성하였다. 템페스트는 처녀작 ‘잊게 해주오’의 히트로 정상급의 대우를 받으며 활동 했으나 몇 년 뒤 해산의 운명을 맞았고 장계현은 솔로로 독립했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콧수염을 기른 채 특유의 비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