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 아 여 왔어요?”
“아니요, 우리 아도 없는데요”
“쇠죽 쒀야 하는데 어델 기 갔나”
고요한 산골 새벽은 장닭 횃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집집마다 아들 찾는 소리가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이럴 수가!” 잠결에 들려오는 어른들의 웅성거림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십리길 차부를 향해 안개 속을 달렸다. 닳아빠진 고무신은 자꾸만 벗겨졌다. 눈물이 흘렀다. 나도 데리고 서울로 도망가겠다고 약속 하고선 자기네끼리 가버린 동네 형아들이 야속하고 야속했다.
땀에 내복이 흠뻑 젖고 나이롱 양말이 너덜너덜 해 져서야 겨우 도착한 차부엔 그 형아들은 먼지 하나 안남기고 떠나고 없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쇠똥만 신작로에 줄지어 있었다. 나의 열 한 살의 봄은 그렇게 배신과 함께 찾아왔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의 처녀 총각들은 아지랑이 타고 오는 꽃소식에 마냥 마음이 설렐 수만 없었다. 범보다 무섭다는 지긋지긋한 농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무작정 상경은 봄마다 치르는 연례행사요 전염병이기도 하였다.
오늘 감상할 노래는 당시 농촌상을 희화화(戱畵化)한 작품으로 1956년에 발표되어 라디오 전파를 타고 경향각처로 퍼져 나갔다.
▲ 김정애 "앵두나무 처녀" 음반 |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메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 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복돌이도 삼용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김정애 “앵두나무 처녀”
그 당시 서울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 가봐야 남정네는 남대문 시장 지게꾼이 고작이고, 여인네는 식모살이밖엔 할 게 없었다. 공장도 노동판도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새벽열차에서 방금 내린 빡빡머리 시골 총각들을 받아 줄 곳은 거의 없었기에 돈 떨어지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만국박람회 성황리에 끝난 덕에 탄력 받은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고, 전국 각 도시마다 공장이 무더기로 들어서며 공장과 건설현장에 인력 수요가 급증했다. 이제 야반도주를 했던 그 빡빡머리 총각들은 당당히 부모형제의 전송을 받으며 고향 땅을 떠났다. 무단가출이 아닌 출향이었다.
오늘 날 우리는 연간 수출액 1조 달러 시대를 이루었다. 그 밑거름이 되어준 ‘공돌이’, ‘공순이’로 비하되던 그 산업역군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에 흡수되었을까? 그리운 얼굴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