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 강토는 70% 이상이 산악지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고을은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각 지방 지명에 뫼 산자가 들어가는 곳이 가장 많은 이유가 되었다.
필자가 태어난 곳 역시 깊은 산골이어서 지평선이 무엇인지 상상으로만 그리며 자랐다. 우리 학급에서 내가 가장 먼저 기차도 타보고 도회지 구경을 한 아이일 정도였다. 시집 온 후로 장터 외에는 한 번도 바깥세상을 구경해보지 못한 부녀자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러한 지리적 여건들이 우리 민족을 좁은 고을 안에 정주하게 만들었고,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고개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되었다.
외부의 이방인이나 신문물이 고개를 통해 들어왔고 야망을 품은 남정네들이 고개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기도 하였다. 고개를 넘어간 남정네 가운데는 다시 고개를 넘어오지 못 한 이들도 많았고 그로 인하여 고개는 한(恨)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고개 안쪽은 현실세계요, 고개 너머는 영(靈)의 세계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갯마루에 장승을 세우거나 서낭당을 짓고 외부로부터의 잡귀를 막거나 고개를 오가는 이들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그렇게 고개는 자연계적 의미를 넘어 우리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상고시대 때부터 불리었다는 우리 민요 아리랑. 그 아리랑이 각 고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수많은 갈래로 나뉘었지만, 아리랑마다 ‘고개’가 들어가지 않는 아리랑이 없을 정도로 고개는 우리 민족의 삶과 궤를 같이 하였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고개 마루에는 장승이나 서낭당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의례 신령이 깃들어 있는 고목나무가 서있었으나, 개발지상주의 열풍에 밀려 이제는 그 모습이 사라져 보기조차 어려우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목나무>를 들으며 그 시절 고갯마루의 모습을 더듬어본다.
▲ 장욱조와 고인돌 음반 표지 |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아래 외롭네
옛사람 간곳없다 올 리도 없지만은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면 기다린 그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아래 외롭네
옛사람 간곳없다 올 리도 없지만은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면 기다린 그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아래 외롭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당시에 음악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으매, 이것이 다 엘피판 아니 당가요. 잉?” 장욱조 선배였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상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어느새 점잖은 목회자가 되어 있었다. 또한 항상 부인과 꼭 붙어 다니는 애처가가 되어있었고 목포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연예활동 할 때보다 행복한지 표정이 매우 밝아보였다.
장욱조는 1968년에 가요계에 입문하여 오랜 무명시절을 보냈다. 1979년에 발표한 <고목나무>의 히트로 잠시 꿀맛을 보기는 하였으나 사실 가수 보다는 작곡가로 더 이름을 얻었다.
조용필의<상처>, 조경수의<아니야>, 최진희의<꼬마인형>, 김미성의<먼 훗날> 등이 그의 작품들이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