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속 그림 보듯 창밖의 풍경들을 감상하던 나는 “남천가절(藍天佳節, 하늘이 푸른 아름다운 계절)이로구나” 단 한마디를 신음처럼 내뱉으며 일어나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벽장으로 골방으로 다시 다락으로 여기저기 틈 있는 곳마다 끼워 넣은 LP판 무더기 속에서 오래된 음반 한 장을 찾아내 먼지를 닦아내고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지지직…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노래는 몇 소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마음이 아려왔다. 눈시울은 빨개지고 온몸이 촛농처럼 녹아 내렸다. 턴테이블이 돌아갈수록 음반에 새겨진 지난 일 년 세월, 고난의 삼백예순날 하루하루가 전축바늘 끝에서 되살아났다.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끝내 못다 털어낸 번뇌 조각들을 책갈피에 주섬주섬 끼워 넣은 채 산문을 나서던 날, 범종 소리는 왜 그리도 골짜기를 오래 맴돌던지. 저자거리로 돌아와 뒤늦게나마 가장의 책무를 다해 보겠노라고 하루에 17시간씩 택시를 몰며 달리고 또 달린 시간들이 눈 밖으로 흘러 나왔다.
그날 나는 ‘구월의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범아가리 보다도 무섭다는 사납금도 잊은 채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소반위에 올려놓았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뿐
<낙엽을 밟는 소리 다시 들으면
사랑이 가는 소리 사랑이 오는 소리>
남겨준 한마디가 또 다시 생각나
그리움에 젖어도 낙엽은 지고
사랑을 할 때면 그 누구라도
쓸쓸한 거리에서 만나고 싶은 것
풍부한 성량과 정확한 발음, 세련된 무대매너로 반세기가 넘게 최정상의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 패티 김! 그녀는 외모에서 풍기는 도회적 이미지대로 1938년에 서울 한복판인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여고에 재학 중일 때 배구선수와 수영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창(唱)에도 대단한 자질을 지녀 입문 6개월 만에 ‘심청가’를 완창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던 1958년은 우리 가요계에 커다란 행운이 찾아든 해였다. 미8군 전문 연예인공급업체인 화양프로덕션에 김혜자라는 예비숙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김영순(베니 김) 전무는 눈이 화등잔만 해져 즉석에서 그녀를 채용했다. 보석을 캐내는 순간이었다. 린다 김이란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얼마 뒤 김 전무로부터 미국가수 페티 페이지처럼 세계적 스타가 되라는 격려와 함께 페티 김이란 이름을 선사 받는다.
국내최고의 무대에만 섰던 페티 김은 음반을 발표하기도 전에 일본 NET-TV로부터 초청을 받아 일본순회공연 길에 올라 화제를 집중시켰다. 그 뒤 미국에서의 성공담, 길옥윤과의 결혼, 앙드레 김과의 패션쇼 등 숱한 화제를 뿌리며 80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정상의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