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네 집은 독집이고 앞뒤 텃밭이 아주 컸다. 그 텃밭은 내가 온종일 꿰지르고 다녀도 싫증나지 않는 나만의 락원이였다. 어른들이 일밭으로 가고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 간 뒤면 혼자 남은 나는 텃밭을 찾는다.
노란 꽃을 달고 디룽디룽 꺼꾸로 매달린 오이도 먹음직스럽지만 찬란한 햇빛 아래 파란 잎사귀 뒤에 반쯤 숨어 빠꼼히 내다보는 빨간 토마토가 더 유혹적이다. 하나 뚝 따서 옷섶에다 쓱쓱 문질러서 그 자리에서 쓱쓱 냠냠 먹어치운다.
뭐니 뭐니 해도 텃밭에선 꽈리의 유혹이 제일 컸다. 꽈리를 뜯어서 겉껍질을 뜯어내고 겉껍질과 이어졌던 자리를 약한 나무꼬챙이로 구멍을 뚫는다. 꽈리즙과 씨가 구멍으로 나오도록 엄지와 식지(집게손가락)로 살살 비비고 우벼낸다. 꽈리 속을 다 우벼낸 다음 껍질만 남은 빈 꽈리를 입에 넣고 공기를 들이그으면* 똥똥 불어난다. 이때 꽈리 허리를 깨물면 꽈르륵 귀맛 좋은 소리*가 울린다. "꽈르륵 꽈르르륵 꽈르륵 꽈르르륵" 끊어질 듯하다가도 이어지는 꽈리소리는 유치원선생님의 풍금소리처럼 듣기 좋다. 거기에다 한여름 낮의 풀벌레악단의 노래까지 더하여져 외로운 줄 몰랐다.
텃밭을 한 고패* 돌고 난 다음에는 헛간에 가서 곧고 긴 수수깡대를 찾는다. 끝 마디를 쪼개서 벌리고 맞춤한 길이의 나뭇가지로 고정시켜서 세모꼴로 만든다. 여기에 거미가 갓 뽑아낸 거미줄을 훌쳐서 감으면 훌륭한 잠자리채가 된다. 잠자리는 민감한 놈이라서 항상 경각성 높이 꼬리를 치켜들고 날개에 힘을 주고 앉는다. 그러다 자취소리만 나면 제꺽 날아간다.
"소곰재(잠자리) 꽁꽁 앉은 자레(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
발을 저겨디디며*, 살랑살랑 잠자리 노래를 부르며 울바자* 꼭대기에 앉은 잠자리를 겨냥해 잠자리채를 날린다. 이모네 동네는 야트막한 앞산을 내놓고는 삼면이 무연한* 논판이라 잠자리가 특별히 많았다. 반나절이면 강아지풀 서너오리*에 잠자리를 꽉 박아 꿰오군하였다.
그러고는 우쭐우쭐 앞마당에 가서 "구구구"하고 닭을 부른다. 나의 구구구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닭들은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하며 몰려온다. 강아지풀 꿰미에서 잠자리를 한 마리 뽑아 날개를 반쯤 자르고 닭무리 속에 던져준다. 그러면 잠자리는 날아가겠다고 공중에서 반쯤 남은 날개를 파닥이고 닭들은 서로 먹겠다고 날개를 퍼득이며 공중으로 솟는다.
그러다가 잠자리를 잡아챈 닭은 입에 잠자리를 문채 빼앗기지 않으려고 급급히 달아나고 챙기지 못해 심술이 난 닭들은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쫓아가면서 부리로 쪼아놓는다. 닭이 잠자리를 물어 가면 또 한 마리 잠자리를 닭무리 속에 던져준다. 그러면 방금 심술이나 쫓아가던 두세 놈이 급급이 되돌아오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더욱 약이 오른 그놈들은 방금 잠자리를 잡아 챈 닭을 쫓아가서 사정없이 쪼아놓는다.
"에이, 욕심쟁이! 그만 심술부려. 너무 욕심부리니까 더구나 안 차례지잖아*."
이런 장면들은 그림책처럼 재미있어 날마다 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대학가는 해에 이모님 뵈려 옛집을 찾아서 회포를 풀었었다. 후에 홀로 남은 이모님이 큰딸 큰사위 따라 연길에 이사 가니 다시 옛집에 갈 기회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사라졌을 옛집이 두려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는 편이 더 적중할 것이다. 아, 내 동년의 락원이여, 영원히 빛바래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행복한 웃음 한 자락 물고 수시로 꺼내볼 수 있으리라.
<낱말풀이>
공기를 들이긋다 : 숨이나 연기 따위를 들이켜다.
귀맛 좋은 소리 : 듣기 좋은 소리
고패 : 일정한 두 곳 사이를 한 번 오고가는 것을 세는 단위.
저겨디디다 :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디디다
울바자 :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로 발처럼 엮거나 결어서 만든 울타리
무연하다 : 아득하게 너르다
오리 : 실, 나무, 대 따위의 가늘고 긴 조각을 세는 단위
차례지다 : 일정한 차례나 기준에 따라 몫으로 나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