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추억의 LP여행" 담당자께
봄비가 내렸나요?
남풍이 불던가요?
한강 물은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경칩이 코앞이니 한강 물이야 당연히 풀렸겠지요.
서녘 하늘에 꽃노을이 지던가요?
종달새가 날던가요?
그렇다면 봄이 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고국의 봄이.
봄비가 내립니다.
남풍도 불고요.
산허리까지 눈이 녹고 눈 녹은 물이 넘쳐
콜로라도 강으로 흘러들면,
그랜드 캐년의 석양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늑대의 외로운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면
이곳에도 봄이 오는 겁니다. 머나먼 이국의 봄이.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미국 땅 하고도 콜로라도로 떠나온 지가.
로키산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봄을 쬡니다.
아아, 보드런 햇살이 얼굴을 어르네요. 눈을 감습니다.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30년 전 이태원의 어느 클럽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 때도 봄날이었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 개나리 덤불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던 봄날이었습니다.
나라는 온통 올림픽 준비로 들떠 있었고
나 역시 오랜만의 외박에 들뜬 마음으로 부대 정문을 나섰습니다.
"철학자 카투사"라 불리던 나는 그날도 왁자지껄한 동료들로 부터 벗어나
혼자 남산 길을 걸으며 봄맞이를 즐겼습니다.
햐야트호텔 쪽에서 내려다 본 노을 물든 한강은
꾸불꾸불 기어가는 한 마리 황룡이었습니다.
약수동 쪽으로 접어들자 나는 버릇처럼 사색에 잠겼습니다.
"과연 그들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어 냈을까?"
계약결혼으로 세계적 이목을 끌었던 싸르뜨르와 보봐르의 관계를 곱씹으며 걷다보니
황룡은 이미 서쪽 바다 속으로 꼬리를 감추었고
나는 어느새 단골 클럽의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봄밤을 즐기려 다들 밖으로 나갔는지 클럽 안은 한산하였고
나는 그 상황을 한껏 이용하여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신청하여 들었습니다.
카투사가 되어 맛 들인 "마티니"의 잔 수가 더해지고
음악으로 온 몸이 적셔질 무렵
갑자기 여태껏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음악이 흘러 나왔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마음이 아련해져
나도 몰래 목로에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괸 채 눈을 감았습니다.
노래에는 아름다운 들꽃이 피어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시냇물이 계곡을 따라 흘렀습니다.
그 노래가 끝난 뒤 누구의 신청곡이냐 물었더니
저 쪽 혼자 앉아있는 미군 여성의 신청곡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결례를 무릅쓰고 그 여군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녀는 나 보다 계급이 높은 초급장교여서 정중히 경례를 붙이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콜로라도 덴버에 있고, 조금 전에 들은 음악은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함께 즐겨듣던 음악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아버지의 생일이라 덧 붙였습니다.
우리는 밤늦도록 한국과 미국의 음악 얘기와 인문학 담론으로 얘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자주 만났고 나는 제대 후 그녀와 결혼 하여,
몇 군데 그녀의 근무지를 거쳐 지금은 그녀와 로키산의 품에 안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포근한 목소리로 청취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김상아씨!
우리 부부의 사랑을 맺어 준 노래
<When it's spring time in Rockies> 를 들려주십시오
로키 산에 봄이 오면
나 그대에게 돌아가리오
산 속의 작은 내님
귀엽고 파란 눈의 아가씨
다시금 사랑한다고 말할 테요
새들이 온 종일 지저귀는
로키산에 봄이 오면
슬림 휘트먼은 1924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컨트리 가수 가운데서도 시골의 정취를 가장 잘 표현한다는 평을 얻었다.
1948년에 데뷔하여 수많은 히트 곡을 남기고 2013년 영면에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후라이 보이’ 곽규석이 슬림 휘트먼의 영향을 받아
미8군 쇼 무대에서 휘트먼의 노래를 자주 부르며 웨스턴요들의 보급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