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싸우고 말다툼하고 앵돌아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퇴근길에 사다주는 고작 “차단(茶蛋)” 두 알을 받아 쥐고도 해시시 했고 포장해서 들고 온 퉁퉁 불은 랭면 한 사발에도 헤벌쭉하는 순둥이였으니 값진 선물 한번 못 받은 것도 내 탓인 듯싶다. 가짜라도 진짜처럼 받아 줄테니 길거리에서 파는 가짜 반지라도 사 달라 했더니 들었는지 말았는지 한번 씽긋 웃으니 그만이다.
무뚝뚝한 자기 오빠한테 연신 쫑알거리는 이 올케가 보기 안쓰럽고 측은해서였을가? 십여 년전 시누이가 한국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나한테 금반지를 선물했다. 살기가 빠듯하다는 핑계로 시부모님이나 시누이한테 언제 통이 크게 마음 한번 써본 적이 없는 시누이에게서 받은 선물이기에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여태까지 한번도 끼지 않고 고이고이 함속에 모셔두고 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랴."는 속담이 있듯 아무리 꾸며봐야 그 모양이지 하면서 언제 예쁘게 화장한 적도, 멋진 옷을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한 적도 없다. 그냥 남 보기에는 안쓰럽지만 평소의 내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할 뿐이다. 원래부터 음치라 노래에는 전혀 관심도 없지만 “위대한 약속”이라는 노래만은 시간만 나면 흥얼거린다. 노랫말이 내 맘에 꼭 닿아서…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의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외국에 가서 일하는 남편은 휴가철에 집에 안 오면 돈도 얼마간 남길 텐데 아들이 보고 싶단 핑계로 거의 해마다 집에 온다. 이번엔 들고 온 트렁크가 특별히 묵직하다. 아들의 장난감과 책을 빼니 여기 한국마트에 가면 흔하게 살 수 있는 먹거리뿐이다. 이리저리 뒤져도 내게는 양말 한 짝도 없다. 심드렁해서 트렁크를 한쪽구석에 활 밀어놓는데 남편이 어쩌다가 정교하게 포장된 것을 하나 건네준다. 내심 기대하고 조심조심 포장지를 뜯었더니 에구구, 김이 새라 웬 놈의 책이다.
⟪명품아내 명품행복⟫ 책 제목은 그럴싸한데 책으로 명품을 대신한다는 뜻인가? 어이없게도 남편은 나보고 당신이 책 읽기 좋아해서 선물하는 것이니 명품을 바라지 말고 사람이 명품이 되라고 한다.
나한테도 좀 친구들한테 내놓을만한 자랑거리를 만들어주면 어디가 덧 날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억울하고 괘씸한 생각에 어제까지 힘들게 일하고 왔다는 사람한테 매섭게 눈을 흘겼다. 그후 이틀 동안 정말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밥만 해주고… 혹시 할 말이 있으면 아들이 중간에서 전하였다.
내가 “현호야 오늘 저녁엔 할머니집에 가자.” 하면 애가 “아빠 오늘 저녁엔 할머니집에 가잠다.”하는 식으로 몇날 며칠 그러다가 남편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야, 네 엄마는 정말 녀장부같다. 입 꼭 다물고 말 한마디 안 하는 것이 옛날에 혁명했더라면 정말 이름 날렸겠다."
그리고는 이번엔 진짜로 선물을 주겠는데 그냥 말 안 하겠으면 안 주겠으니 후회하지 말란다. 한순간의 적막도 겨우 참는 나는 믿기지는 않았지만 선물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헉 이게 뭐야?”
그런데 이번에는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인민폐 20만 원짜리 통장이다. 백 원, 이백 원, 천원, 만원… 다닥다닥 찍혀있는 입금내역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꾸만 동그라미 개수를 세어본다. "일, 십, 백, 천, 만" 틀림없는 20만원이다. 월급 타는 날짜를 잊을세라 기억해서는 생활비요, 보험비요, 하다못해 난방비까지 갖은 명목을 만들어서는 나머지 없이 다 보내게 했는데 언제 이 돈은 모았을까?
돈을 보니 바보웃음이 절로 새어나온다. 큰돈을 못 번다고 고시랑거릴 땐 언제고 오늘따라 갑자기 내 남편이 제일 멋지고 잘 생긴 것 같아 보인다. 이제는 기대고 살아도 될 듯싶어 시름이 놓인다. 남편은 여태껏 못 사준 선물을 이 돈으로 맘껏 사라면서 마음을 풀었다. 가방도 사고 옷도 사고 실컷 쇼핑하란다. 정작 진짜로 명품 한번 걸쳐보라고 하니 오히려 사양하게 된다. 요상한 내 마음이여…
큰돈은 못 벌어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 뛰는 든든한 남편이 있고 뛰어나진 않지만 밝고 씩씩하게 자라는 아들이 있어서 적어도 이 순간만은 참으로 행복하다. 감기 걸려 누워있는 내 이마에 꼭 짜지도 못한 물수건을 얹어주면서 "엄마, 내 이렇게 어린데 아프지말구 건강해야 됨다."하면서 제 걱정인지 엄마 걱정인지 하는 엉뚱한 우리 아들, 장난감이 욕심난다면서 창문에 붙어 서서 달님을 우러러 누가 그 장난감을 사주십사 소원을 빌었다고 능청스런 말까지 건네는 아들이다.
오늘도 아파트 울안에서 "빵빵ㅡ" 경적을 울리며 신호를 보내는 광민이네 차를 타겠다고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도 잊지 않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도 출근길 조심하쇼."라고 소리치는 정 많은 아들 녀석, 아들이 앉은 차가 멀리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지극히 평범한 국수아줌마의 분주한 하루가 또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