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이태원(梨泰院)은 외국인들이 붐비는 국제적 명소다. 새롭게 유입되는 외래문화에 힘입어 늘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면서 국제 문화 교류의 마당 그리고 문화 창조 마당으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곳에 우리 문화의 원형적 산실인 부군당이 이태원 2동에 자리하고 있다.
부군당은 현재의 하얏트호텔 근처에 있었던 남산 외인주택 자리에 있었다.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앞쪽의 화려한 한강수와 뒤쪽의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남산을 배경으로 하여 이태원 일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1917년(대정 6년) 일본제국주의가 부군당 터에 일본군 훈련소를 설치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태원 부군당이 현재 자리로 옮겨온 이 후에도 이곳의 당집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마을 제당의 모습을 갖춘 조그마한 집 곧 약 다섯 평 남짓의 기와를 얹어 지은 1칸짜리 목조 건축물이 전부였다. 따라서 당시의 당집은 현재처럼 부군당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도 없었으며, 당집의 높이도 그다지 높거나 장엄하지 않은 소박한 형태였다.
그런데 1967년 마을 사람들이 부군당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당의 규모를 늘리고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으며 주의의 담장을 높게 쌓아 올린 것이다. 현재 부군당 정문의 비석도 1967년 보수 정비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이태원 부군당의 역사를 증언하는 토박이들에 따르면 수백 년이 되었다는 사람이 있고 무려 1.000여 년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단기 3952년, 곧 조선조 광해군 11년(1619년)에 새워졌다고 새겨져 있다. 비석에 새겨진 역사를 따른다면 이태원 부군당의 역사는 400년이 되는 것이다.
이태원 부군당을 한편에서는 부군묘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행해지는 의례 역시 당굿, 당제, 묘제 등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이는 의례 공간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 ‘당’과 ‘묘’가 혼합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통용되는 의례 행위로써의 ‘굿’과 ‘제’는 그 표현 방식에 있어 나름대로 규칙이 설정되어 있다. 곧 의례행위 공간의 인식에 따라 의례 명칭도 달리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례 행위 공간이 ‘당’으로 인식될 때에는 ‘굿’이나 ‘제’로 쓰이지만 ‘묘’로 인식될 때에는 ‘제’라고만 쓰인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당’이라는 공간 인식에서는 굿이 성립되지만 ‘묘’라는 공간 인식에서는 그렇지 못함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당’의 공간적 개념과 ‘굿’의 의례적 개념은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곳 이태원 부군당 바깥쪽 문 위에 걸려있는 현판과 전각 정문 앞 비석에는 모두 부군묘(府君廟)라고 쓰여 있다. 부군당 출입 정문 오른쪽 벽기둥에 걸려있는 현판에도 [梨泰院洞府君廟管理委員會]라고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묘(廟)’라는 표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간판들의 이름에서 보이는 ‘묘(廟)’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원래 이곳의 제당은 우리나라 전형적인 마을제당의 형태를 갖춘 한 칸짜리 목조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제당의 격조를 높이고자 건축물을 보다 장엄하게 만들게 되었고 그 이름도 당(堂)에서 묘(廟)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변화 시기는 이곳 제당의 건축물을 새롭게 단장할 1967년이다. 그 당시 건축물을 개축하면서 그 이전에는 없었던 당을 둘러쌓는 벽, 정문, 전각 문 위쪽의 현판, 전각 정문 앞의 비석 등의 조성으로 제의 공간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이곳을 ‘부군묘’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널리 조성되어 있는 제당을 당(堂)으로 호칭하여 왔다는 데에는 특별한 이견이 없다. 다만 지역에 따라서는 이를 좀 더 격조 있게 하기 위해 묘(廟)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서울 이태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호칭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을뿐더러 그 이유도 단순하다.
마을 어디에서나 마을 사람들이 중시하고 신성시하는 공동체의 건축물을 보다 격조 있게 꾸미고자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적어도 식민지 정책을 경험하고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바뀌는 해방 직후의 시기에서 생성되어진 우리 근대사의 한 측면이다. 이때는 민족 종교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적극적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기존 문화의 페레다임을 새롭게 조성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전래되어진 해 묶은 것과 유입되어진 햇것이 충돌되면서 서로 간에 갈등이 고조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민족주의에 의한 민족문화 자긍심이 자연스럽게 증폭되어 가는 사회적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전래된 전통을 보듬어 안고 전진할 수 있는 중요한 시대적 구호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써 ‘미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당시 그러한 민족주의와 민족문화적 명분 세우기의 사회적 조건에서의 무속은 어쩔 수 없이 도교 또는 유교 등의 다른 공인 집단으로 탈바꿈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시대의 상황에 맞물려 무속집단도 자연스레 외형적 탈바꿈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그러한 문화적 변환과정 속에서, 이태원 마을당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동안 미신처럼 여긴 무속집단이나 마을의 굿당을 사회 지식층이 인정하는 도교 내지는 유교적 제당으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다.
앞서 논한바와 같이, 당(堂)이라고 할 때에는 ‘굿’이라는 의례와 맞물려 무속적 냄새가 짙고, 묘(廟)라고 할 때에는 ‘제’라는 도교적 내지는 유교적 냄새가 짙은 고급스러운 의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에서 묘로의 탈바꿈은 제당 관리 및 유지 기금 마련에 학식을 갖추거나 부유한 주민들이 보다 쉽게 개입할 수가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제당은 현대사회로 돌입하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전통이라는 뿌리를 안고 살아남게 되었다. 한편, 마을제당을 당(堂)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묘(廟)라고 부르는 배경에는 은연중 무속신앙의 배타성과 동시에 도교 내지는 유교사상의 우월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