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경인철도회사에서 어제 개업예식을 거행하는데, 인천에서 화륜거가 떠나 삼개 건너 영등포로 와서 경성의 내외국인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에 실린 경인철도 개통관련 기사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6년 전 일이고, 경술국치를 당하기 11년 전 일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철도 개통은 세상이 떠들썩하게 자축해야할 크나큰 경사겠으나,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마냥 웃으며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구미 열강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극동의 작고 힘 없고 늙은,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서로 삼키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나라와 러시아,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이들은 조선지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지배와 대동아(大東亞)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경인철도 개통이 그 시발점이었다.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처음 따낸 사람은 모스라는 이름의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금력도 없는 자로서 1896년 부설권을 따낸 뒤 자본주를 구하다 여의치 않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 정부에다 팔아버렸다. 이에 일본은 서둘러 경인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사에 총력을 기울여 그 해 9월에 노량진-제물포간 33.2Km의 경인선을 완공하였다.
뒤이어 일본은 1903년에 경부철도 부설권을 따내어 곧바로 착공하였으며 숨 돌릴 틈도 없이 경의선과 마산선 공사에 들어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는 이미 이 땅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철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으로 더욱 탄력을 받은 일본은 1914년에 호남선, 경원선을 개통하였고, 22년에 충남선, 28년 함경선, 31년에 장항선을 개통하였으며 37년 혜산선, 39년에 경춘선, 평원선, 만포선을 완공하였고 다시 42년에는 중앙선까지 연결하여 해방당시에는 한반도 안에만 6,362km에 이르는 철로를 보유한 상태였다.
이를 근거로 삼아 일본의 우익은 물론 심지어는 한국의 정신 나간 사람들까지 일본이 우리 근대사의 시혜자인 양 떠들고 있지만, 그 철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자원들이 실려 나갔는지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이 건설한 철도는 군사요충지와 주요 항구에 맞닿아 있기에 철도 건설에 열을 올린 그들의 속셈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으로 철길도 38선에 막혀 남쪽 구간은 2,642km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후 극심한 좌우이념갈등의 대 혼란기 속에 철도 건설은 꿈도 못 꾸다가 49년에 이르러, 영암선과 영월선의 첫 삽을 떴으나 6.25의 발발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쟁 후에 가까스로 완공을 하긴 했으나 나라 형편상 몇몇 지선 외에 새로운 철도는 꿈꿀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60년대 말에 불어 닥친 고속도로건설 붐에 밀려 철도의 존재감은 한동안 위축되었으나, 도시의 교통체증과 고속도로의 과포화현상 등으로 철도의 중요성이 재인식 되면서 지하철로 고속철도로 국가 대동맥의 위상을 거뜬히 되찾았다.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땅의 사람들과 숱한 사연을 함께해온 기차! 누구에게나 고향집 울타리의 호박넝쿨 같은 아련함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유쾌한 시골영감 - 노래 강홍식
싀골영감님께서 서울구경을 떠나시엿는데
자못 유쾌한 장면이 만엇겟다(에헴)
싀골영감 처음타는 긔차노리라
차표파는 아가씨와 승강을하네
이세상에 에누리업는 쟝사가어듸잇나
깍거대자고 졸나대니 원이런질색이
긔차란놈 뛰-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작놀내 돈을다내며
깍지안코 다낼테니 날좀태워다주
져긔차좀 붓드러요 돈다낼테니
다음차는 만원이라 자리가업서
엽헤깐을 슬적보니 텡텡비엿네
올타구나 땡이라구 슬적안젓드니
표검사에 이등이라구 돈을더물어
이럭저럭 서울에를 도착하여서
인력거를 타시는데 발판에안저
우로올나 안즈라니 영감님말슴
이등타면 돈더밧게 나는실코매
“살살이” 서영춘의 단골메뉴인 <시골영감>은 이미 19세기 말에 음반으로 나와 크게 히트한 외국곡이다. 조지워싱턴존슨이라는 미국의 흑인가수가 1895년 <재미있는 노래(The laughing song)> 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그 뒤 1925년에 대서양 너머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펜로즈(Charles Penrose라는 코미디언에 의해 <웃기는 경찰관(The laughing policeman>이라는 제목으로 재생산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홍식이 1936년 맨 먼저 불렀다. <처녀 총각>이라는 불멸의 히트곡을 남긴 바로 그 인물이다. “눈물의 여왕”이라 불렸던 전옥의 남편이었으며, 배우 강효실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최무룡의 장인이니 최민수에겐 외할아버지가 된다. 해방 후에 북한 문화예술계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71년에 영면했다.
그 다음 20여년이 흐른 뒤에 “홀쭉이” 양석천이 불렀는데 만담가 오길래가 대사를 맡았다. 그의 콤비인 “뚱뚱이” 양훈과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청중들은 배꼽을 쥐고 굴렀다. 가수로 연예계에 입문 했다가 희극인으로 전향했으며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90년 호흡기질환으로 타계했다.
그 다음이 “살살이” 서영춘이 1970년에 부른 것으로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곡이다. 얼굴연기의 달인으로 구봉서, 배삼룡과 함께 우리 희극계의 삼두체제를 구축했던 인물로 86년에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연기력이 좋아 수 백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아들 서동균과 딸 서현선도 대를 이어 희극인의 길을 걸었다.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 했던가!
흘러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지만 지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와 또 우리를 이렇게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