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목민심서의 산실인 사의재 (돌)
주막집 사랑방에서 바뤘나 (빛)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으로 (달)
유배의 길에도 의를 세웠네 (심)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신유박해의 여파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 약 4년 동안을 강진 읍내의 한 주막집 사랑방에 머물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되어 낯선 남도의 객지 주막방에 기거하게 된 그의 처지는, 조선 후기 지식인이 겪은 정치적 박해와 시대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바람을 막는 허름한 방, 떠도는 장정과 나그네가 오가는 주막집 한쪽 편에서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학문과 성찰에 더욱 몰두하였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수많은 저술의 씨앗 또한 이 시기의 고독한 사색과 절제된 삶 속에서 잉태되었다. 이 주막집 사랑방 문 위에 걸린 현판이 바로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하도록 경계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유배 생활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세운 삶의 규범이자 학문적ㆍ윤리적 좌표였다. 곧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외부 세계가 무너져도 내면의 질서만큼은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선비의 자기 수양 선언이자, 유배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인간다운 품격과 도덕적 중심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합작시에 등장하는 불한시사 시우들의 아호와 이름의 약자, 즉 ‘돌·빛·달·심’이 사의재를 상징이라도 하듯 의미를 부여한 독자도 있었으니, 다산의 유배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거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돌’ 같은 마음, 어둠 속에서도 사유를 비추는 ‘빛’, 외로운 밤길을 묵묵히 밝히는 ‘달’, 그리고 끝내 꺾이지 않는 <목민심서>의 ‘심(心)’은, 사의재의 네 가지 다짐이 단지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한 인간이 절망을 건너는 실존적 태도임을 보여준다. 유배의 길 위에서도 의(義)를 세웠다는 합작시는, 다산이 억울한 처지 속에서도 학문과 도덕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 삶을 재건해 나갔던 정신을 압축적으로 전한다.
이처럼 사의재는 단순한 현판 하나가 아니라, 다산 유배 생활의 출발점이자 《목민심서》ㆍ《경세유표》ㆍ《흠흠신서》 등 위대한 저술로 이어지는 사유의 출발선이었다. 권력과 명예를 잃은 자리에서 다시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는 학문이 태어났고, 유배의 고통은 백성을 향한 연민과 제도 개혁의 문제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겨울 같은 유배의 시간 속에서, 다산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네 가지 ‘마땅함’을 통해 내면의 봄을 준비했던 셈이다.(라석)
|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