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석 선생 묘역안내판 58년 만에 고쳐

  • 등록 2019.08.26 11: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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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리석 외손자들, 외할머니 합장 사실 표기 뜻 이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효창원에 잠들어 계신 외할아버지(차리석) 무덤에 외할머니(강리성)가 합장되었다는 용산구청의 안내판 수정(2019.8.14)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58년 만에 이뤄진 숙원이라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3시, 늦여름 매미가 세찬 소리로 울어대는 용산 효창원 내 차리석(車利錫, 1881 - 1945) 선생의 무덤에서 만난 차리석 선생의 외손자 유기방(64살), 유기수(61살) 씨는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기자 앞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놓았다.

 

흔히 효창원 묘역에 모셔진 분은 3의사 묘역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과 임정요인 묘역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 그리고 김구 선생 이렇게 7인이 묻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9인이다.

 

7인 외에 2인은 다름 아닌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와 차리석 선생의 부인 강리성 여사다. 차리석 선생의 무덤에는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1년 4월 18일 서울에서 세상을 뜬 부인 강리성 여사가 합장되어 있으며, 김구 선생의 무덤에는 1999년 4월 12일 부인 최준례 여사가 남양주 진건 송정리에서 이장되어 합장되었기 때문에 이 두 분과 함께 현재 효창원에 잠들어 계신 분은 모두 9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김구 선생 묘역의 안내판과 묘비석엔 부인 최준례 여사가 1999년 4월 12일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었지만 그동안 차리석 선생 묘역 안내판과 묘비석엔 부인 강리성 여사의 합장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았었다.

 

 

애당초 묘역 조성 때 그러한 사실을 안내판이나 묘비석에 기록해야 함에도 방치된 채 58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늦었지만 강리성 여사의 유족들이 발 벗고 나서서 문제 제기를 한끝에 2019년 8월 14일에야 ‘합장 사실을 추가로 적은 안내판 정비’를 마칠 수 있었다.

 

“말도 마십시오. 외할머니(강리성)의 합장 사실을 차리석 선생 묘역 안내판에 표기해달라고 지난 1월 29일부터 민원을 낸 이후 약 200여 일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처럼 이장한 것도 아니었으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곧바로 합장 사실을 표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차리석ㆍ강리성 부부의 외손자 유기방 씨는 외할머니(강리성)가 세상을 뜬 이후 58년 만에 묘역 안내판에 새겨진 ‘합장 표기’를 확인차 고운 꽃바구니를 만들어 외할아버지 차리석, 강리성 부부 무덤에 바치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동암 차리석(東岩 車利錫, 1881 –1945,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였으며, 105인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3.1만세 운동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임시의정원 위원, 국무위원 등을 지냈고, 임시정부가 없어질 위기에 놓였을 때 임정을 고수하여 1935년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서장에 뽑혀 활약하였다. 또한 한국독립당 이사를 지냈으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단무를 총괄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려던 중 중국 충칭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리성(姜利聖, 1879- 1961) 외할머니와 차리석 외할아버지의 합장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안내판 표기 수정’ 신청을 했던 유기방ㆍ유기수 두 외손자는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산구청에 제출했던 두툼한 서류 뭉치와 ‘차리석 묘소 비문 및 안내판 부인 강리성 합장 사실 기록 요청 경과보고’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처음에는 국가보훈처(2019.1.29.)에 ‘비석 비문 및 안내판 수정 설치 요청’을 했으나 무덤 관할이 용산구청이라고 떠넘기는 바람에 용산구청(2019.3.18.)과 수차례 협의 끝에 차리석 선생 묘역 안내판에 합장 사실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현장에 가서 본 표지판에는 차리석 선생의 약력 밑에 다음과 같이 부인 강리성 여사에 대해 표기되어 있었다.

 

“1961년 4월 18일 부인 강리성(1879-1961) 여사와 합장하였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더 남아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는 안내판과 묘비석 모두 합장 사실을 밝히고 있으나 외할머니(강리성)의 경우는 안내판만 수정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 묘비석에도 합장 사실을 새기려면 또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라고 유기방ㆍ유기수 외손자는 말했다.

 

하지만 유기방ㆍ유기수 두 외손자는 ‘무덤의 안내판과 묘비석에 합장’ 사실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바로 잡아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외손자들은 두툼한 서류를 내놓으면서 ‘중요한 문제’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것은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먼저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을 보면 297쪽 3~4행 부분에 보면 “그러는 사이 상해에 있던 부인도 세상을 뜨게 되었다.”라고 기술했고, 《차리석 생애와 민족운동》 166쪽 1~3행에 보면 “동암(차리석)은 부인과 사별한 후 홀로 생활을 하다가 1934년 3월에 홍민영(洪梅英) 여사와 새롭게 결혼했다. 이때 동암의 나이 54세였고, 홍 여사의 나이는 22살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유기방ㆍ유기수 두 외손자에 따르면 이 기록은 명백한 오류로 차리석 외할아버지와 강리성 외할머니 부부는 상해에서 1922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으며 외할머니는 식당 등을 하면서 김구, 이시영, 이동녕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는 것이다. 이후 강리성 외할머니는 1940년 둘째 딸 차영희를 데리고 귀국한 뒤 서울 마포구 연희동에서 둘째 딸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1961년 4월 14일 서울에서 사망하여, 4월 18일 효창원에 잠들어 있는 차리석 선생과 합장된 것이라고 했다.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바로 <동아일보> 1961년 4월 16일자에 실린 '강리성 여사의 사망 ' 단신 기사다. 이런 분명한 역사적 사실(팩트)을 놔두고 책의 저자들은 왜 이런 잘못을 그대로 책에 기록했는지 두 외손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리석 선생과 부인 강리성 여사는 1899년 혼인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얻었으나 4남은 어려서 일찍 죽고 차영애(1911-1995), 차영희(1918-1966) 자매가 있었는데 이날 만난 차리석 선생의 외손자 유기방ㆍ유기수 형제는 차리석 선생의 둘째 딸인 차영희 여사의 아들이다. 한편 차리석 선생은 1943년, 후처인 홍매영(洪梅英, 이명화 씨가 지은 책에는 홍매영을 홍민영이라고 했다.)여사를 만나 1944년에 아들 차영조를 낳았다.

 

 

 

유기방ㆍ유기수 씨는 외할머니의 사망일을 포함한 여러 곳의 심각하게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출판사에 찾아가기도 하고 저자들을 만나 보았으나 아직껏 이에 대한 뚜렷한 확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잘못이 명백한 책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2차, 3차 인용자들이 계속 잘못된 정보로 기사를 양산해 내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기자도 이들의 그런 지적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는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우리문화신문과 오마이뉴스에 차리석 선생의 여동생인 차보석 지사 관련 “애국지사 차보석 선생의 조카 차영조 씨와의 대담”이란 제목의 기사를 지난 2018년 2월 4일자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 기사에서 차영조 씨가 차리석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쓴 바 있다. 그러나 그 뒤 유기방ㆍ유기수 씨로부터 ‘유일한 혈육’ 이라는 부분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고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강조했다. “외할아버지(차리석)가 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이 워낙 커서 그동안 가정사로 생각되어 일체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상해에서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외할머니가 식당을 꾸려가면서 김구, 이시영, 이동녕, 문일민, 안창호, 조성환, 구익균 지사들의 식사 편의를 돕고 다락방을 독립투사들의 회의 장소로 제공하면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했던 사실을 외면한 것은 물론 1961년까지 살아 계셨던 외할머니가 1930년대 죽은 것으로 왜곡된 단행본 등이 그대로 유포되고 있는 현실에 눈감을 수 없었습니다. 차리석, 강리성 부부의 후손은 이제 60여 명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쏟아져 나오는 기사에 차리석 선생의 후처인 홍매영 여사가 낳은 차영조 씨가 유일한 혈육처럼 기술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또 그들은 “김구 선생의 무덤은 알아도 부인 최준례 지사가 합장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역시 강리성 외할머니야말로 동암 차리석 선생이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한 분이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합장한 사실도 제대로 기록되어야만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늦여름 매미 소리가 더욱 거세던 효창원 9인 묘역, 그늘 벤치에 앉아 기자는 차리석 선생의 외손자 유기방ㆍ유기수 씨 가족의 58년 간 묻어 두었던 애끓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60이 넘은 두 외손자는 감격한 듯 했다. 그동안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두 외손자는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지난 8월 14일, 효창원에 잠든 외할아버지(차리석) 묘역 안내판에 ‘1961년 4월 18일 부인 강리성(1879-1961) 여사와 합장하였다.’라는 1줄의 수정 기록을 용산구청으로부터 받아낸 외손자들은 다시 묘비 수정을 위해 뛰겠다고 했다.

 

“외할머니에 관한 없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차리석 선생의 본부인으로 독립운동의 최선봉에서 뛰어온 외할머니의 삶이 왜곡으로 가득한 채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을 후손된 입장으로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961년까지 멀쩡히 살아계셨던 외할머니를 1930년대에 작고하셨다는 오류를 그대로 두는 등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할 독립운동가 기록물이 심각한 왜곡 상태로 방치되어있어서야 어찌 역사의 정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두 손자는 입을 모았다.

 

차리석 선생의 외손자 유기방ㆍ유기수 씨는 생전의 어머니 곧 차리석 선생의 둘째딸 차영희 여사도 이러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차제에 독립운동에 여성들이 헌신한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효창원에 묻혀있는 ‘7위(位) 선열’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 여사와 차리석의 부인 강리성 여사를 포함하여 ‘9위(位) 선열’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 남편 혼자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인가!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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