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 망국 앞에 선 한 선비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2020.12.03 11:28:16

황현 생가, 무덤, 사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철종 6년(1855) 12월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장수 황씨의 집안으로 조선 초 명재상인 황희의 후손이다. 그의 10대조는 황진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8대조인 황위 또한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의 가문은 유학의 선비정신에 투철하여 도리와 의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틈 철저하였으나, 시류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문의 역사속에 황현의 아버지는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시골 땅 광양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그 곳 광양에서 황현이 태어났다. 아버지 황시묵은 한 때 양반가문에서는 잘 나서지 않던 상업에 뛰어들어 가산을 불리기도 하였으나, 양반가문으로 집안 분위기 일신을 위하여 1850년 쯤 광양으로 이사하였다.

 

광양에 터를 잡은 황시묵은 선비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집안에 유교경전과 1천여 권의 다양한 책을 갖추어 놓고 인근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런 환경에서 황현도 유학과 선비의 길에 들어섰다. 황현의 스승은 왕석보(1816 ~ 1866)로 경학과 시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왕석보는 황현이 11살 때 지은 시를 보고 매우 놀라며 그가 훗날 훌륭한 선비가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고 한다.

 

황현은 15살 때인 고종7년(1870) 해주 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황현은 20살쯤 서울로 올라가 세상견문을 넓히고 개화사상가였던 박규수, 김옥균 등과도 사귀었다. 황현은 평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한때 과거에 응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28살 때 뛰어난 인재들의 한사람으로 추천되어 보거과에 응시하여 사실상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을 주는 것에 반발하여 부패한 세상에서 더이상의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황현은 광양에서 멀지 않은 구례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상경하여 생원시에 응시하였고, 장원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33살 때의 일이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와 부패한 관리들이 판치는 것을 보면서 1890년 다시 구례로 돌아왔다.  이후로 구례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후진양성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그는 매화가 많은 구례땅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매천(梅泉)이라 지었다.

 

황현이 시골살이를 하던 때인 구한말로 1895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일본정부가 사주한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국정을 개혁하겠다며 갑오개혁을 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외세들이 들어와 국토가 유린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매천은 저술의  필요성을 느껴 이때부터 《매천야록(梅泉夜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써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나라는 점점 더 기울어만 갔고 1905년에 이르러서는 외교권마져 빼앗기고 말았다. 사실상 식민지 상태가 되어가는 조선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1907 ~ 1908년 황현은 아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자 매천은 나라가 망한 사실에 절망하여 더이상 삶에 미련을 갖지 못하고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절명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때가 1910년 8월 7일이다(양력 9월 10일). 비록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같이 있지 않았지만, 나라를 지키는데 나서지 못한 재야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에 스스로 자책하며 당시 위정자들이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여 그들이 배운 지식과 선비의 정신을 되찾길 바라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이다.

 

그가 일기처럼 써 내겨간 《매천야록(梅泉夜錄)》은 1864년 부터 1910년 까지 47년 살아온 편년체 역사일기다. 그의 초년 기록은 간단한 메모 같은 일기였으나 1895년 갑오경장 이후의 기록은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대를 토로하며 자신의 심정을 담아 일기를 썼다.

 

그 주요 내용은 고종황제, 명성황후, 대원군, 안동김씨, 여흥민씨 등 당대 정치세력들의 동향과 문제점,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들의 침략과 이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 등을 세밀히 다루었다. 당시 최대 정치세력이면서 서로간에 철천지 정적이었던 흥선대원군과 민비에 대한 평가도 있는데, 그가 본 흥선대원군은 공과 과가 반반이라 하였고, 고종황제와과 명성황후에 대하여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바로잡지 못함에 비분강개하며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고 죽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 이 시대를 바로 살아가는 길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세를 바로잡아야할 때이다. 110년 전 망한나라에 속죄의 마음으로 한을 남기고 죽어간 매천 황현의 심정에서 나라의 바른 미래를 생각하며 이 시대를 바라볼 때다.

최우성 기자 cws01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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