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는 정치가다. 그렇다면 세종의 일상 정치를 통해 세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황희 정승의 사의 파동이 있다.
황희의 사직파동 - ①
세종은 스스로 학문이 탄탄한 면이 있어 여러 가지 제도 개혁부터 과학적인 창제에 이르기까지 좋은 업적을 쌓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은 훌륭한 인재를 옆에 두고 잘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종과 후대의 정조 임금을 조선왕조에서 높이 올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종의 인재 가운데 행정 분야에서는 황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황희(黃喜, 1363~1452, 호 방촌-厖村)는 개성 태생으로 우왕 말기 진사시에 합격, 창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태종 2년(1402)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태종 8년 민무휼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적극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그때도 유배라기보다 일선에서의 후퇴였다. 이어 세종 4년(1422)에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의정부 좌참찬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하였다.
8년 이조판서ㆍ우의정 거쳐 다음 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위 '서달'을 방면하여 파면되었다가 한 달 뒤 복귀하였다. 10년에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를 받았으며 12년 말(馬) 1천 마리를 죽게 하여 투옥된 제주 감목관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황희는 굴곡을 겪은 인간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행정 조정을 잘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황희 어머니 돌아가시다
세종 9년 여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황희는 상중에 있게 되었다. 7월 15일에 좌의정 황희의 어머니 상사(喪事)에 부의로 쌀과 콩 50석과 종이 1백 권을 내린다. 이후 3달이 지나자 황희가 전을 올린다.
"엎디어 전지를 듣사오니, 동궁을 모시고 명나라에 가서 황제께 조현하라 하시고, ... 신에게 의정부 좌의정을 제수하사 곧 기복(起復, 어버이 상중에 벼슬에 나가다)하라 명하시니, 신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3년의 복(服)을 제정하여 천하의 공통된 상제(喪制)로 한 것입니다. ...
신이 이전 임오년에 아버지상을 입었을 때 겨우 마지막에 이르러 탈정(奪情, 부모의 상중에 출사)하여 복제를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사세가 몹시 곤궁하여 사양하거나 피하지 못해 자식의 직분을 폐지하였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슬픈 감정이 마음속에 얽혀있습니다. 이제 또 어미가 세상을 버리어 상제(喪制)대로 망극한 정을 풀어 볼까 생각하옵더니, 겨우 석 달을 넘기자 문득 기복의 명을 받잡게 되오니 천지에 두려움이 그지없습니다.
탈정 기복(奪情起復)이란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위급하고 어려울 때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지고 좌우하는 사람이라면 부득이하여 임시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으나, 요즈음처럼 무사태평한 때 어찌 권도로 행하는 제도에다 보잘것없는 몸을 적용하여 고금의 대전(大典)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세종실록》9/10/8)
세종이 파격적인 권도를 행하시고 고금의 도의를 저버리고 있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상(喪)을 지키는 일은 효자의 지극한 정리이나 나라를 위하여 권도를 따르는 것도 또한 인신(人臣)의 통달한 절의(節義)이다. 또한, 정승의 임무는 서민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 경은 슬픔이 깊기때문에 그렇겠지만 내가 그대를 믿고 의지하는 간절한 심정을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임금과 어버이는 오륜에 있어 다만 이름과 자리만 다를 따름이요, 충(忠)과 효(孝)는 두 가지 도(道)가 아니고 시행하는 것은 모두 한 가지이다. ... 상중이라도 굽혀 따라 통변(通變, 바꾸어서 통하는)하는 것은 대체로 그러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효(孝)를 옮겨서 충(忠)을 하는 것이 오직 이때일 것이니 국가와 더불어 몸을 같이함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나의 간절한 마음을 힘써 따라서 그 직책에 나아가도록 하라. 사양하는 바는 마땅히 허락하지 아니하겠노라.”(《세종실록》9/10/8)
여기에 세종의 생각이 비친다. 임금이나 정승은 국가가 먼저이고 효와 충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 경우 통변도 가
능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황희가 또 전을 올려 말하기를,
충과 효 :
“충과 효는 신하의 대절(大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로서 어느 한쪽도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함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이 정승에 있어 하찮은 몸을 어찌 감히 아끼어 괴로움을 꺼리겠나이까. 엎디어 바라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신의 슬픔을 불쌍히 여기시어, 벼슬을 도로 거두 시사 상제를 마치게 하옵시고, 새로 어질고 능한 이를 택하여 중임을 맡기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세종실록》 9/10/8)
황희가 다시 거절하자 예문관 직제학 유효통(兪孝通)을 명하여 다시 그 집에 나아가서 전을 돌려주게 하였다.(10월 8일자 《세종실록》 기사에 그간의 경과를 정리하고 있다.)
그중 10월 17일 좌의정 황희가 사은(謝恩, 은혜를 감사히 여겨 사례함)하였다는 실록 기사가 보인다. 이후 잠시 조정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세종의 숨은 보완책이 나온다. 실은 세종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고기권유 :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예전에 나이 60 이상인 사람은 비록 거상중(居喪中)이라도 오히려 고기 먹기를 허락하였는데, 지금 좌의정 황희는 이미 기복(起復,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하였고, 나이도 또한 60이니 거친 음식을 먹을 수 없으므로, 내가 불러서 고기를 권하고자 하였다가 마침 몸이 불편하여 친히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나의 명으로 〈황희를〉 빈청(賓廳)에 청하여 고기 먹기를 권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혹은 대신을 접대하는 법을 가볍게 할 수 없으니 나의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친히 보고 고기를 권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정흠지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친히 권하지 않으시더라도 만약 고기 먹기를 명하시면 어찌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므로, 빈청에서 접대하고 고기를 권하니, 황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이 지금 병이 없어 소식으로도 먹을 수 있사오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으리오." 하므로, 정흠지가 말하기를, "임금의 명이시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황희가 "성상께서 신이 늙었으매 혹시 병이나 날까 가엾게 여기셔서 고기 먹으라고 명하시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고서 자리에 나아가 먹었다. (《세종실록》 9/11/27)
결국, 황희가 고기를 먹게 되었는데 이는 상중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금기(禁忌, 터부)를 깨는 것으로 세종의 마음 나눔에 황희가 제 뜻을 굽히고 조정 일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의 신하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