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400여 명의 일경과 맞선 김상옥을 아십니까?

2022.01.26 11:51:51

99년 전 1월 나라와 민족에 바친 그의 삶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32]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종로구의 종로5가와 6가 사이 위쪽에는 효제동이란 곳이 있다. 북쪽으로는 이화동(梨花洞), 동쪽으로는 충신동(忠信洞)ㆍ종로6가, 남쪽으로는 종로5가, 서쪽으로는 연지동(蓮池洞)과 접해 있는 지역인데 지금부터 99년 전인 1923년 1월 22일 이곳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동네의 이혜수란 사람의 집에는 열흘 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34살의 한 청년이 숨어들어 있었는데, 추적하던 일본 경찰이 새벽에 이 청년의 은신처를 알고는 무장경찰 4백여 명을 동원해 이 씨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던 상황이었다. 이에 이 청년은 지붕 위로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일본 경찰과 지붕을 타고 다니며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여 많은 일본경찰이 죽거나 다쳤지만, 탄환이 다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자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열흘 전 청년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당시 종로경찰서가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 압살하여 한국인들의 원한의 상징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탄으로 일본 경찰이 직접 죽거나 다친 것은 아니지만 일제 탄압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제에게 그들의 압제와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우리 민족의 강한 기개를 드러낸 것으로 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다.

 

이 청년이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이다. 그야말로 열사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대한남아다. 그가 태어난 곳도 이 동네, 곡식을 거르는 체를 만들어 파는 아버지를 도와 소년시대를 보낸 김상옥은 17살이 될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학교에서 주경야독에 힘썼으며 23살이 되는 1912년에는 남한 각지를 돌며 약 행상을 하고 철물상점을 경영하면서 돈을 조금 비축하자 그 이듬해 경북에서 동지를 규합해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였고, 일본상인들에 대항하여 일화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19년에 범민족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소식과 독립사상 드높이기 위해 <혁신공보> 등 지하신문을 매달 1천 부씩 발행해 배포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증거부족으로 석방되자 이듬해인 1920년에 무장 의열투쟁을 지향하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마침 권총 40정, 탄환 3천 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제휴하여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주살과 적 기관 파괴 등의 계획을 진행해 나갔으나 거사 하루 전날 한훈과 김동순 등이 체포되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상해에서 선생은 임시정부 선배 지사들의 격려를 받아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에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21년 7월에 일시 귀국하여 국내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으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자 한탄하며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때를 만들어갈 것을 결심하고 1922년 12월 초 동지 안홍한과 함께 트렁크식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 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숨긴 채 일생일대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상해를 출발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의 귀국 목적은 암살단 이래의 숙원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사이토(齋藤實) 조선 총독의 주살에 있었다. 서울에서 옛 동지들인 전우진과 이혜수 집에서 거사준비를 갖추어가다가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 무렵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웠다.​

 

폭탄 투척 후 선생은 1월 17일 일본 동경으로 떠나는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서울역과 가까운 후암동 소재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으나 은신처가 탐지되어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의 무장한 순사 14명에 의해 포위되자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타무라(田村長七)를 사살하고 포위망을 탈출해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근방에서 승복으로 바꿔입고 효제동 이혜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본 경찰이 4백여 명의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 무렵 이혜수 집을 겹겹이 포위하자 선생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무장한 수백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쿠리다(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자 마지막 탄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당시 선생의 나이 34살이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니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국사 시간에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 주인공이 김상옥이란 것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지난해 말 동숭동 대학로에서 친구를 만나다가 거기 마로니에 광장에 서 있는 한 동상을 보게 되고 그 주인공이 김상옥임을 알게 되자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인 이 애국지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영화가 되기는 했다. 2015년에 개봉돼 큰 호응을 받은 <암살>이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서울에서의 결투장면이 김상옥 열사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라는 것을 이로써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영화 <암살>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다. 배우 전지현이 열연한 안옥윤의 실제 본보기는 남자현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자현 지사는 주로 만주에서 독립군들을 지원하면서 1925년에 사이토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일이 있지만,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돕다가 1933년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순국함으로써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로 칭송받은 위대한 애국자다.

 

안옥윤이란 이름은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 등 대표적인 독임운동가 3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가공의 이름이다. 영화에서 안옥윤과 속사포 황덕수가 강인구를 습격할 때 전지현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김상옥이 종로 효제동에서 마지막 총격을 벌인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 하겠고 다만 김상옥이 쌍권총을 들고 싸운 것은 영화에서는 하와이 피스톨이 그 역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암살>이란 영화에서는 김상옥이란 열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배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영화는 다른 많은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김원봉만은 김원봉이란 실제 이름으로 등장시킴으로서, 이 영화가 김원봉을 미화하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김원봉은 적어도 나라를 위해 직접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 북으로 넘어갔다가 결국 처형된 인물을 우리가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라지만, 그 전에 사실 이상으로 미화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곧 3.1절이라고 영화 <암살>을 다시보기 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만난 김상옥 열사, 그의 장쾌한 투쟁의 일화가 영화화되었지만 다른 여러 인물의 혼합상에 섞여 그 실체를 우리가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옛날 그가 태어나고 자란 효제동이 곧 마로니에 광장 부근이었다는 점 때문에 여기 서 있는 이 동상을 혹 보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분이 정말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진정한 애국열사라는 점, 99년 전 1월 하순 강추위 속에서 홀로 그의 삶을 이 나라와 민족에 바쳤다는 점을 기억하고 그를 기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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