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자 씨, 그대의 목은 판소리 목이 아니네”

2022.04.19 11:41:14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71]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부타령>의 노랫말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랫말들을 10여 가지 뽑아 소개하였다.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노래를 시작으로 “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落花) 진다고 설워마라.”, “어지러운 사바세계 의지할 곳 바이 없어,”, “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하늘같이 높은 사랑, 하해(河海)같이 깊은 사랑”, “창문을 닫혀도 숨어드는 달빛” 등등이었다.

 

경기입창 소리꾼, 이건자의 공부 과정을 이야기하는 도중, <창부타령> 이야기가 나와 그 노래와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판소리 예능보유자 신영희 명창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던 중, 연말 모임에서 판소리가 아닌 창부타령을 불러 소리판을 뒤집어놓은 이건자는 그 이후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건자의 경기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가야금, 아쟁산조의 달인, 백인영 명인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백인영 명인은 단지 산조음악만을 잘 탄 명인이 아니다. 물론 산조 음악이야말로 고도의 기교와 음악성이 있어야 하는 민속음악으로 누구나 연주하고는 있으나, 누구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은 아니다.

 

 

“백인영 앞에서 함부로 가야금을 타지 마라”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을 정도로 백인영은 음악적 재기(才氣)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여성국극단에 입단해서 명인 명창들과 함께 그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이 남달랐기에 그는 즉흥 음악의 대가로도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음악이든지 한 번만 들으면 그대로 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나 열정이 대단했던 연주자였기에 많은 제자들이 그 앞에 몰려들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백인영이 이건자를 불러 조용히 충고했다고 한다.

“이보시게, 건자 씨, 그대의 목은 판소리목이 아니라 경기소리 목이네, 판소리를 접고, 본격적으로 경기소리에 도전해 보시게.”

 

백인영뿐이 아니었다. 그가 부르는 경기민요를 들어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길을 바꾸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나도 백인영으로부터 “이건자는 경기목인데, 되지도 않는 판소리에 매달리고 있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바 있다. 백인영 말고도 이건자에게 경기소리를 추천한 명인이나 명창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결국, 주위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설적인 충고를 듣고, 이건자는 판소리를 포기하고, 경기소리를 근본적으로 배우기 위해 선생의 품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고 다가가려 노력했으나, 판소리는 늘 저만치 멀리 있는 소리였다. 어쩌다 경기소리를 부르게 되면 그렇게 신이 나고 자신감이 넘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고민도 함께 다가왔다. 오랜 시간 판소리의 실창과 이론적 공부도 하였고, 또한 생활면에서도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아 온 데다 지도 선생은 말없이 앉아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 떠난다는 하직인사는 참으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선생에게 무어라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이건자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스승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사도 못 한 채, 훗날을 기약하며 선생의 곁을 떠나가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그는 지금까지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신영희 명창의 곁을 떠나 온 이후, 이건자는 경기 산타령의 전수조교이며 소리와 발림, 재담이 능한 윤평화 명창에게 경기소리의 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다. 윤 명창은 정말 흥이 많은 소리꾼이었다. 소리를 할 때나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는 몸동작에도 흥이 넘쳐나는 끼가 많은 소리꾼이었다. 여러 사람이 일렬로 서서 산타령을 부를 경우에도, 윤 명창은 스스로 흥이 넘쳐나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추임새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2010년 전후, 그와 함께 미국 UCLA 공연을 2~3회 다녀온 기억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무대에 서면 산타령이 어떤 노래인가 하는 해설이 필요 없고,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이건자는 그의 문하에 들어 소리 공부를 하며 산타령은 물론, 경기지방의 다양한 민요를 거의 섭렵했으며 또한 윤평화 명창을 통해 선소리 산타령의 예능보유자인 황용주 명창을 소개받게 되어 현재까지도 산타령을 비롯한 경기 민요 전반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건자는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국가 무형문화재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를 거쳐, 전수조교(현재는 전승교육사)가 되어 동 보존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악계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신영희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 곁을 떠나면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늘 죄송스럽고 후회가 되지요. 지금은 선생님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가 되셨고, 이건자도 전승교육사가 되어 그나마 전보다는 조금 편하게 서로를 멀리서 응원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어 다행입니다. 신영희 선생님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이건자의 고민이 담긴 결정을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개척해 온 길에 신영희 명창도 충분히 이해해 주었으리라고 믿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