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벽잠에서 깨어난 현영감의 마음은 지푸라기 헝클어뜨린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사람이 그렇게 또렷하게 꿈에 나온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만증에다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할멈을 부축해 오줌을 뉘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 껍질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기만 했다.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볼 일이야 없겠지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멈 몰래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며 조반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청소이시더. 박 씨 양반 댁이니껴?”
“아,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 당부도 있고 해서 삼우가 지나면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박 씨.
야위어 보여도 단단한 구석이 느껴지던 사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러쓰는 작은 손이 맵차 보이던 사람.
얄궂은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매제가 될 뻔했던, 눈꼬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사람.
그가 현영감을 찾은 건 두어 달 전 가을 거두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여기가 월외리가 맞습니까?
아까부터 낯선 이가 집집이 다니며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현영감네 차례까지 온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쁜 게 농사일이라 다들 들로 나가고 낮에 사람이 있는 집은 이제 구십을 바라보는 현영감네 밖엔 없었다.
“맞니더. 여가 월외시더.”
“아, 그럼 혹시 현상기라는 분이 아직 살고 계시는 지요?”
현영감은 멀리서 온 듯한 나그네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얼른 안으로 맞아들였다.
맞절을 나누고 앉으며
“제가 현상기이오만 어인 일로?”
“혹시 ‘속실’이라는 마을을 기억하시는지요?”
“충주?”
“예”
“아, 알다마다요.”
속실.
홀씨처럼 떠돌던 현영감 아버지가 한 때 보따리를 풀었던 곳이긴 하나
현영감에겐 그리 좋은 기억이나 특별히 나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은 아니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도 서로 팔자가 다르듯 한솥밥을 먹는 가족도 서로 처지가 다른 법이다.
현영감 가족도 공동운명체 안에 있긴 했으나 각자 처한 상황은 달랐다.
현영감의 아버지는 책임감이나 미래에 대한 설계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하루가 좋으면 그만이고 그 순간만 좋으면 그만인, 코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어찌하여 장가를 들고 그럭저럭 아이 넷을 낳긴 했으나 그의 방랑벽은 수그러들질 않았다. 울진 처가에 처자식을 맡겨 놓고는 그림자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했다.
어느 해인가 그가 웬일로 처자식을 데려가겠다며 사람을 보내왔다. 단, 식구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오라는 조건을 달았다. 현영감의 어머니인 새터댁은 고민 끝에 열세 살 큰아들은 머슴으로 주고 일곱 살 큰딸은 남의 집에 양녀로 보내고 열한 살 먹은 작은아들과 젖먹이 작은딸만 들쳐업고 그 낯선 사내를 따라나섰다. 그 작은 아들이 바로 현영감인 소년 현상기였다.
길도 글도 모르는 새터댁 가족은 걷기도 하고 때론 기차를 타기도 하며 그 사내가 이끄는 데로 이틀 만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말이 집이지 기울대로 기울어 엎어지다시피 한 걸 그래도 누군가가 지붕만은 억새로 이어 놓았다. 그곳에서 새터댁네는 멀건 보리죽으로 연명하며 몇 날 며칠을 기다렸으나 도통 남편이 올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상기가 놀러 나간 틈을 타서 그 사내가 새터댁을 덮쳤다. 이젠 남편을 찾아갈 수도,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새터댁은 그 사내와 같이 살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서 씨 다른 딸을 둘을 낳게 된다. 그 오두막이 있는 곳이 청송 땅에 딸려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마을 사람들과 말문이 트인 뒤의 일이었다.
자신의 씨를 받은 아이가 생기자 그 사내는 데리고 온 자식들을 노골적으로 구박하기 시작했고, 새터댁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진 목숨을 이어가느라 정신없는 틈에도 세월은 흘러 상기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랐고, 스무 살 되던 1951년에 징집되어 전선에 배치된다. 상기가 군에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내는 병을 얻었고 이태를 앓다가 세상을 떴다.
그는 눈을 감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신도 머슴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을 가졌으나 혼기를 놓친 데다 모아 놓은 재산도 없어 외롭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다 충주의 어느 공사판에서 현 씨 성을 가진 한 인부를 알게 되었고, 어느 날 술자리에서 울진에 버리고 온 처자식 얘기를 현씨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 씨는 그때 이미 다른 여인을 만나 다른 가정을 꾸린 터라 처자식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그는 거짓으로 일을 꾸몄고, 그게 오늘을 있게 한 것이라고 실토하고 떠났다.
새터 댁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장사를 치르긴 했으나 딸 셋의 입을 거둘 길이 막막했다. 데리고 온 딸이 저고리 밑단이 들릴 만큼 젖 봉우리가 복숭아만 해지긴 했지만, 아직 날품팔이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땅이라곤 엉덩이 하나 붙일 땅도 없는 데다 턱 괴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오두막마저 완전히 엎어지고 말았다. 솟아날 구멍 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었다.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맞아 죽자고 작정한 새터 댁은 딸들을 앞세우고 그 사내가 남긴 말꼬투리를 나침반 삼아 충주 땅으로 나섰다.
그랬다.
그게 7년 만에 군에서 돌아온 상기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었다.
새터 댁은 “이게 다 첨지가 저질러 놓은 일이니 죽이든 살리든 첨지가 알아서 하라”며 본 남편 집으로 밀고 들어갔지만, 한 지붕 두 마누라에다 새 마누라가 데리고 온 아이까지 세 씨 형제가 이루고 있는 가정이 여북했겠는가? 이게 현영감이 가지고 있는 “속실”에 대한 짧은 기억이었다.
“그런데 속실은 우예?”
“어르신은 저를 몰라도 저는 어르신을 잘 압니다.”
“글니껴?”
“어르신 동생 분 가운데 ‘말선’이라고 있었지요? 처녀 때 세상을 뜬.”
“아 예, 맞니더만 우리 막내 ‘말서이’는 처자 때 죽은 기 아이고 시집가서 아를 둘이나 낳고 죽었는데요.”
그 말을 들은 낯선 손님의 얼굴이 점점 하얘지더니 얼음장으로 굳어버렸다. 한참 만에 정신을 가다듬은 손님의 입에선 애달픈 사연이 구슬이 되어 굴러 나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박용복이며 속실 현 씨네 뒷집 자손이라 했다. 말선이 보다 두 살 위로 글 모르는 말선이에게 글자도 깨우쳐 주며 사이좋게 지냈다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둘에게는 연분홍 꽃물이 들었고 서로 없으면 못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어르신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려가겠다며 오셨지요?”
현영감은 곳간으로 달려가 다시 기억 한 바가지를 퍼왔다.
그랬었다. 제대하고 돌아와 사라진 가족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속실.
아무리 개똥밭에 구르듯 살아왔어도 그건 아니었다.
상기는 아비규환인 가족의 실상에 칡뿌리 씹듯 이를 옹새물고 그곳을 떠났다.
정처를 고민하던 그는, 고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라도 있는 청송 월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년을 머슴살이하며 열심히 새경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른이 훌쩍 넘어가 버렸으나 그에겐 장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어르신께서 속실에 오셔서 정리되는 대로 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먼저 떠나셨지요? 그 뒤 말선이와 저는 ‘죽어도 떨어지지 말자’라며 서로 팔뚝에다 먹실로 점을 떴지요. 그래도 모자라 아이라도 낳으면 될까 싶어 배를 맞추어 봤으나 안타깝게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안달이 난 저는 부모님께 사실을 말씀드렸지만 ‘천하의 상놈 자식과는 죽어도 혼인 못 한다.’라며 길길이 뛰셨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광에 가두셨지요. 말선이 또한 더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끌려서 떠났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문고리에 손목을 묶고 울부짖는 말선이 손등을 부지깽이로 내려치고 인두로 지져서 끌고 갔다더군요.“
현영감은 손님의 얘기를 들으며 깨진 장독 쪼가리를 맞추어 나갔다. ‘어떤 놈하고 맺은 맹세냐?’며 전서방이 술만 취하면 트집을 잡아 마누라를 두들겨 패던 그 팔뚝 점. 월외에 온 뒤에도 오랫동안 남아있던 손등의 멍 자국과 평생을 달고 살았던 인두자국. 그렇게 조각들을 맞추다 보니 형태가 갖추어지긴 했으나 아직 빈 곳이 있었다.
“그런데 우얘서 우리 막내가 처자 때 세상을 뜬 거로 아시니껴?”
현영감은 손님의 대답을 듣고서야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수 있었다.
월외로 온 뒤 웬일인지 막내의 눈은 매일 멀겋게 부어있었다. 어머니와 언니들이 한 시도 막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는 느꼈으나 삶이 고달픈 상기에게는 그런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질 틈이 없었다. 얼마 뒤 어머니는 입을 줄여야 한다며 딸들을 개입에 고기 던져주듯 닥치는 대로 치우기 시작했다. 현 씨 자식 가운데 막내인 옥기는 같은 동네 늙은 영감의 재취로, 이가의 씨를 받은 딸 가운데 큰 딸인 분선이는 재 넘어 총각에게로 한 해 봄, 가을에 둘씩이나 여의었다. 물론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시가(媤家)에서 ‘싸’갔다.
이제 말선이만 남았는데, 말선이야 아직 열일곱 밖에 안 되었으니 급할 게 없다는 게 상기의 생각이었으나 어머니에 의해 완전히 빗나가게 된다. 분선이 혼례를 치르자마자 새터 댁은 아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서둘러 속실을 향해 길을 나섰다.
“속실을 떠난 지 이태 뒤인가 모친께서 저를 찾아오셨지요.
그리고는 말선이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잊고 다른데 장가를 들라 하시더군요. 몹쓸 병이 데리고 갔다고 하시면서요.
저는 말선이를 만나던 상수리나무 밑으로 달려가 나무껍질이 벗겨지도록 긁으며 피를 토했습니다. 저도 그 길로 말선이를 따라가도 싶었으나 모진 게 목숨인지라 이렇게 칠십이 넘도록 살아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혀 대듯 속실을 다녀온 새터 댁은 단김에 쇠뿔을 뽑을 기세로
말선이 혼담을 성사시켜 나갔다.
신랑감은 아랫말 과부댁 큰아들로 ‘꾀재이(꾀쟁이)’, ‘알분 재이(쟁이)’,
‘살살이’ 같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잔꾀가 많고 살살거리며 동네 온갖 참견은 다 하고 다니는 청년이었다.
용복이와 생이별을 당하고 맥을 놓고 살아온 말선이에게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얼없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말선이는 말을 잃었다. 콩쿨대회마다 휩쓸던 노랫소리도 끊겼다. 첫 아이가 아들이라며 시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말선이는 “피식” 바람 새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딸을 낳았을 때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남편 전서방이 화투장에 밥을 말아 먹어 가산을 탕진해도, 술 발광으로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도 백분 같은 그녀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할매요, 큰일 났니더. 이집 막내딸이 죽었다니더.”
아랫말 아낙네가 혼비백산해서 올라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상기는 어머니를 부축해가며 달려갔다.
“서방 낯짝에 똥칠을 한 년. 장사도 지내지 말고 가래이를 째가 다리 한 짝은 앞산나무에 걸고 한 짝은 뒷산에 걸어 삐라.”
노름판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온 전서방은 핏발 선 눈으로 마당에서 악다구니하고 있었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말선이는 양반다리를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어머니와 오빠를 맞았다.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음이리라. 잠든 새끼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이 달걀만 하게 부어있었다. 치마끈을 잘라 이어 선반에 묶고 목을 걸고 앉은 모양이었다. 시집온 지 여섯 해 만인 스물세 살 때였다.
“혹시 술 있습니까?”
현영감은 소주 한 병을 소반에 차려냈다.
담배도 술도 안 한다는 그 손님은 말없이 소주잔을 거푸 비워냈다.
“자초지종이야 어찌 되었건 어차피 말선이 산소를 찾아보러 온 것이니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산소엔 비석도 반석도 없었다. 자식들도 다녀가지 않았는지 그 흔한 조화 한 송이 없었다. 늙은이 젖무덤처럼 납작해진 묏등엔 앙상한 억새 이삭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음기둥으로 서 있던 용복이는 늦가을 햇살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소리 없이 시작된 그의 속울음은 이내 오열로 바뀌며 금방이라도 내장을 쏟을 것 같았다.
“말선이를 찾으러 저승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승이라고 못 가겠습니까?”
날이 저물었으니 자고 가라 붙잡는 현영감을 뒤로하고 그는 그렇게 돌아갔다.
“아버님은 거기를 다녀오신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석 달도 못 채우고 떠나셨습니다. 장례가 끝나면 어르신께 전화나 한번 드리라는 말씀을 남기시고요.”
현영감이 맥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창밖을 내다보니 까치 한 마리가 감나무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대는 오늘밤도
내게 올순 없겠죠
목메어 애타게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여
못다 한 이야기는
눈물이 되겠지요
나만을 사랑했다는 말
바람결에 남았어요
끊을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인연을
운명이라 생각했죠
가슴에 묻은 추억의 작은 조각들
되돌아 회상하면서
천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대를 다시 만나면
세상에서 못다 했던 그 사랑을
영원히 함께 할래요
최명숙이 본명인 최진희는 1957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양떼들>이라는 여성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82년에, 밤무대에서 제법 유명세를 떨치던 밴드인 <한울타리>에 발탁된다. 베이스 연주자 허영래와 함께 부른 ‘그대는 나의 인생’은 그녀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그 뒤로 승승장구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가수로 성장하며 수많은 히트곡과 수상이력을 쌓았다.
특히 김정일이 그녀의 열성팬이어서 북한에서의 인기도 뜨거웠으며 그 여세로 여러 차례 평양공연을 하기도 했다.
‘천상 재회’는 99년에 나온 ‘최진희 11집’에 수록되어 특히 중년여성들의
뜨거운 사랑을 얻어낸 노래다.
*거두미 : 거둠질(추수)의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