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1958년 2월 홋카이도 산속 땅굴에서 한 사람이 발견되었다. 미츠다 이쿠오(満田郁夫)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 교수는 땅굴에서 14년 동안 숨어 살다가 발견된 중국인에 대한 시를 《群》(통권14호 2003.10)에 발표했다. (《문학과 현실》(2010년 봄호)에 번역 소개됨) 미츠다 교수의 시는 다음과 같으며 내용이 조금 길다.
류리엔렌(劉連仁)이 죽었다
- 미츠다 이쿠오
산동성(山東省) 쯔아오포(草泊)촌의 1944년9월 어느 아침
마을 서쪽 변두리에 사는 친구가 불러서
신혼의 처 스물세 살 쨔오유이란(趙玉蘭)이 지난밤까지 꼬박 바느질해서 아직 옷깃을 달지 않은
새 솜옷을 입고 신바람이 나서 걷고 있었던 류리엔렌은
다리 위에서 군인에게 붙들려 연행되었다
남자들이 전쟁에 끌려 나간 일본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내각은 중국인 노동자를 내지로 이입하는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이년동안 삼만팔천구백삼십오명의 중국인을 일본에 연행해서
홋카이도(北海道)에서 큐슈(九州)까지 일본전국의 광산 등지에서 노예노동을 시켰다
그 와중에 육천팔백삼십명이 죽었다
도조내각에서 그 일을 담당한 상공대신(商工大臣)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그래서
류리엔렌의 집은 가난해서
부모와 아직 어린 네 명의 남동생, 한 명의 여동생, 아내는 임신 7개월
그들 모두의 생계가 서른한 살인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던 건데
새로 지은 솜옷을 걸치고 걷고 있던 그는 다리 위에서 군인에게 붙들려 연행되었던 것이다
칭타오(靑島)에서 아내가 갓지어준 솜옷은 아직 옷깃이 달려있지 않은 채로 벗겨져 압수당하고
다갈색 빳빳한 홑옷으로 된 군복을 받고
홋카이도로 끌려가서 탄광에서 일을 해야 했다
도망쳐 나와 구멍에 숨었다.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전을 몰랐다.
1958년 2월 구멍에서 나오자
기시 노부스케(岸信界)를 수상으로 하는 일본정부가 그를 밀입국자 취급했다.
파란 끝에 귀국할 수 있었다
하쿠산마루(白山丸) 트랩을 텐진(天津) 탕쿠(塘沽)신항의 부두에 내리자
열네 살짜리 소년과
서른일곱 살이 되는 여자가
달려와 안겼다
그 해에 신민만보(新民晩報)의 기자 오우양원빈(歐陽文彬)이
<구멍에 숨어서 십사 년>을 썼고
1959년 2월 미요시 하지메(三好一)가 일본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읽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가
1961년 1월 방송시 <류리엔렌 이야기>를 짓고
1968년 12월 그 시에 대해 내가 논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윤동주를 소개하여 수많은 일본인에게 윤동주의 시를 심어준 시인이기도 하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류리엔렌 이야기>에서는 류리엔렌의 탈출과 14년을 어떻게 땅속 생활을 해왔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44년 9월 아침, 새신랑이었던 류리엔렌은 쯔아오포(草泊)촌 일대가 <중국인 노동자 이입 방침>을 위한 일본군의 사냥터라는 것 따위는 꿈에도 모른 채 길을 걷다가 잡혀갔다.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 사람들이 가오미현(高密県)에 도착했을 때는 동네 사람이 80명이 넘었다. 거쳐 지나가는 마을마다 쥐 죽은 듯 문을 걸어 잠그고 떨며 문틈으로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저무는 태양 속으로 800명의 사내들이 사라졌다. 그 800명은 칭타오(靑島)의 컴컴한 화물선 밑바닥에 실렸다. 총검을 든 일본군 감시 아래 지문을 찍었는데 노공(勞工)협회의 종신 노예계약을 뜻하는 계약서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800명 가운데 뽑힌 200명은 이틀 동안 기차를 타고 다시 배를 타고 홋카이도 탄광으로 갔다. 10월 말임에도 눈이 내려 나무가 쓰러질 정도의 엄동설한에 그들은 탄광에 들어갔다. 9명이 하루에 차량 50대분의 석탄을 캐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탄광일을 하는 동안 죽음에 이르는 구타를 수없이 당했다. 그 상처들은 살갗 안으로 파고들어 탄진이 마치 문신처럼 몸에 새겨졌다.
강제연행자들에 대한 일본측의 ‘환경규정’에는 입욕시설도 필요 없고 숙소는 앉아서 머리 위로 6~9센치 높이면 족하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탈출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감시자들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가 붙잡아 와서 본보기로 죽이거나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구타했다. 동료가 산채로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능함에 몇 번이나 치를 떨었던가. 봄이 오고 눈이 사라지자 류리엔렌도 탈출했다. 그때 도망친 중국인 5명은 사냥꾼도 들어가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몇 달 만에 굶주린 나머지 마을로 내려간 2명은 붙잡혀 갔고 3명은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땅굴을 파고 거의 반년 동안 겨울잠을 잤다. 배를 훔쳐 달아나려고도 했지만 발각되어 2명은 붙들려가고 류리엔렌만 도망쳤다. 땅굴을 조심히 옮겨 다니며 숨어 살았다. 여름에 계곡에서 목욕을 하다가 개척촌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내 아이가 태어났다면 이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되었을까하고 생각하며 서로 물을 튀기며 놀았다. 그러다가 마을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숨어서 경계했다.
땅굴에서 숨어 산 지 10년이 넘으면서 가족의 얼굴도 흐릿해져 가고 ‘아내도 아마 다른 곳으로 시집갔겠지, 설령 살아있더라도...’ 라는 생각을 하며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겨울잠을 마치고 땅굴에서 나오려면 이틀 정도는 연습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걷는 연습 시간이 점점 오래 걸려서 2달 정도 연습해야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고 통증도 심했다. 나중에는 더 심해져서 가을쯤이 되어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홋카이도에 이른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땅굴 속으로 쫓겨 들어가 짐승처럼 살면서 기억과 사고가 단절된 채 지내야했다. 1958년 2월, 엄동설한에 사냥꾼에게 발견된 류리엔렌은 스파이로 몰려 취조당하고 불법입국자로 정리되는 상황과 맞닥트렸다. 죄도 없고 군인도 아닌 농부가 이 지경이 되도록 <중국인 노동자 이입 방침>을 만들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界) 상공대신이 그때 당시 총리대신이 되어 있었다. 뜻있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은 납치되어 강제노역을 당한 중국인 10만 명의 명부를 일일이 뒤져서 그의 이름을 찾아냈다.
특별히 류리엔렌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아내가 재혼하지 않고 아들을 잘 키워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소식이었다. 류리엔렌은 드디어 텐진(天津) 탕쿠(塘沽) 신항에 마중 나온 아내와 아들을 부둥켜안았다. 류리엔렌과 아내 쨔오유이란(趙玉蘭)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산동사투리로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끝>
■ 중국인 강제연행에 대하여
도조(東条)내각은 1942년11월27일 ‘중국인 노동자 내지(일본) 이입에 관한 건’을 각의 결정하고 그해 가을부터 중국 산동성에서 ‘노동자 사냥’을 시작했다. 1943년 4~11월 8집단 1,420명을 시험적으로 연행해 왔다. 1944년2월28일 ‘중국인 노무자 내지(일본) 이입 촉진에 관한 건’을 차관회의에서 결정하고 1944년 3월 본격적으로 중국인 강제연행을 시작해서 탄광, 광산, 항만, 발전소건설, 군사공장 건설현장 등 전국35개사 135개 사업소로 보냈다. 강제연행 총수는 약4만명(외무성자료: 169집단 38,935명)이었고 그중 희생자는 약20%인 7,000~8,000명(외무성자료: 6,830명)에 달하는 극한 노동현장이었다.
<참고자료:長野県木曽高等学校開放講座、第3回「木曽戦時下の外国人強制労働の歴史1」,1995.7.22. 横野秀昭>
■ 조선인 강제연행은 파악하기 어렵다
이처럼 중국의 강제연행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만 조선의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전쟁을 캐묻는다(戦争を掘る)>(長野県歴史教育者協議会, 재인용)에서는 조선인 강제연행 총수를 대략 175만명 또는 200~4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츠모토(松本)지역에서 외국인강제노동 시민운동가로 활동 중인 곤도 이즈미(近藤泉)씨는 “일본은 패전 직후 중국으로부터 강력하게 항의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인 강제노동에 대해 자료를 정확하게 정리해서 전달했다.
그런데 조선의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조선인을 ‘제국신민’이었다며 슬쩍 넘어가려는 것도 있었지만, 조선이 해방직후 남북으로 분열되어 일본에게 피해에 대한 추궁을 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모든 자료를 철저히 소각하여 없앴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 수치를 알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 이후 다시 미소 강대국의 간섭으로 인해 분열되는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는 일본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못했고 감정적인 개개인의 원한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서 빛을 발하고 있건만, 어렵게 쟁취한 일제강제동원에 대한 피해보상 대법원 판결도 한일화해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강제노동이 아니었다고 하며 교과서에 ‘강제’라는 단어를 빼겠다는 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어 희생자들을 두 번 희생을 시킨 셈이 되었다. <끝>
1회부터 5회분의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부정에 대한 반박 글> 을 보내 준 미츠다 이쿠오 교수와 류리수 박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그동안의 연재는 5회분을 끝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