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9)는 국치일(國恥日)이었다. 국치일이란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곧,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국권을 강탈당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을 강탈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이란 ‘숨 쉬는 것’만 빼고 모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숨 쉬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으니 생사여탈권을 모두 빼앗긴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의식주 가운데 의생활을 담당했던 면화도 그 ‘강탈’ 가운데 하나다.
<목포근대역사관1관> 2층에는 일제의 면화 침탈의 시작을 알리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는 비석이 있다. 비석 글씨는 조선제 6대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재임 1931~1936)의 글씨다. 이 비석 뒷면은 '明治37年(1904년)에 목포주재 대일본제국 영사 와카마츠 도사브로(若松兎三郞)가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석의 원본은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 고하도 선착장에서 원마을로 가는 들머리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2012. 5. 21. 목포시 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 <목포근대역사관1관>에 있는 것은 모형비석이다.
“육지면(陸地綿)은 미국산 면화로 고품질 다수확종이었으나, 일본의 다습한 기후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여 일본은 미국과 중국에서 육지면을 전량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1904년 목포에 부임한 일본 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가 목포 앞 고하도에서 육지면의 시험 재배에 성공하였다. 1906년 통감부는 면화재배의 모든 권한을 일본면화재배협회에 위탁하였으며, 일본면화재배협회는 면화재배를 위한 채종 사업을 통감부의 권업 모범장 목포 출장소에 위탁하였다. 통감부는 육지면 종자를 한국 농민들에게 보급하여 육지면 재배를 확대시켜 나가려 하였지만, 한국 농민들은 비협조적이었다.” 이는 <목포근대역사관1관> 쪽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농민들은 면화재배에 비협조적이었을까? 그 까닭은 간단하다. 면화재배로 생산된 수익을 공평하게 조선인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평하게 나누기는커녕, 일제는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헐값에 후려쳤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나카노 세고우(中野正剛, 1886~1943)가 쓴 책 《내가 본 만선(我が觀たる滿鮮)》(政教社, 1915)에는 당시 조선인들의 반응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국 농민은 면화의 증산을 기뻐하지 않았다. 수매독점권을 가진 면화업자나 면방적업자만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매하기 위해 면화의 품질을 평가할 때도 1등을 2등이라 하고, 2등을 3등이라 하는 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또 면화재배 농민이 애써 2∼3일이 걸려 먼 곳에서 면화를 판매소로 운반해 와도 관권을 휘둘러 시간이 늦었다거나 등의 핑계를 대어 값을 후려 깎았다. 더구나 당시는<회사령>이 시행되고 있어서 기존의 면방적업자는 이익을 더욱 독점할 수 있었다.”
- 中野正剛, 《我が觀たる滿鮮》(政教社, 1915), p23∼26. -
나카노 세고우는 한국 농민이 면화 증산을 기뻐하지 않은 까닭을 일본 면화업자들이 ‘온갖 핑계로 값을 후려 깎은 점’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히사마 겐이치(久間健一)의 《조선농정의 과제(朝鮮農政の課題)》(成美堂, 1943)에서도 “일제는 한국에서 면화생산을 강요하기 위해 지극히 난폭한 방법을 동원하였는데 헌병이나 순사까지 나서서 면화를 재배하지 않고 보리나 콩을 심은 농가에 대해서는 콩과 보리를 발로 밟아 부러뜨리는 일도 자행했을뿐 아니라 일본인의 강제적인 소위 농사 지도는 한국인에게 원성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가운데 줄임) 일본인은 총이나 칼을 휴대하고 다니며 면화재배를 강요했다.”
-久間健一, 《朝鮮農政の課題》(成美堂, 1943), p15 -
이러한 조선에서 면화재배 강요와 강탈에 대한 역사를 알고 있다면 <목포근대역사관1관> 쪽의 설명은 다소 안이한 느낌이다. 더군다나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에 대한 ‘강탈과 수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기자의 눈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는 모형 비석을 보는 관람객들이 혹시 ‘아주 자랑스러운 비석’ 쯤으로 여길까 우려스러웠다.
내친김에 “통감부는 육지면 종자를 한국 농민들에게 보급하여 육지면 재배를 확대해 나가려 하였지만, 한국 농민들은 비협조적이었다.”라는 <목포근대역사관1관>의 현재의 설명을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써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는 이 비석 옆 벽에 붙어 있는 안내문 제목 부분의 "일본 면화재배협회, 한국 농민들에게 면화재배를 장려함" 이란 문구다. 이건 "장려"가 아니라 "강요"라고 써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자의 의견 제시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본질은 일제의 ‘면화재배 강요와 그에 따른 수탈의 역사’를 이 전시를 통해 명확히 알게 했어야하지 않나 하는 점이다.
어제(29일) 국치일을 맞아 <목포근대역사관1관>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일제강점기에 토지 수탈, 식량 수탈, 사람 수탈(노동자 강제노역과 위안부 강제동원)은 결코 없었다.”라는 궤변의 책 《반일 종족주의》가 떠 올라 가뜩이나 무더운 늦여름 습기찬 불가마 더위가 더욱 뜨겁게 온몸에 달라붙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