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추상적인 말장난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사랑도 하지 말라”는 법구경의 구절을 미스 최와의 관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불경에서 의미하는 사랑은 어느 수준일까? 만일 그녀와의 관계가 발전하여 육체적인 사랑까지 나누게 되는 시점이 온다면 김 교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스 최와 혼인까지 갈 수는 없고, 거기까지 도달하게 되면 결국은 그녀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이별의 순간이 올 것이다. 결국 사랑의 끝은 이별이기 때문에 괴롭게 된다는 이야기인가?
사랑의 수준이 문제일 것이다. 당초에 약간의 호기심에 젖어 기대했던 대로 한 달에 한 번 만나 차나 마시고 아가씨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에 그친다면 법구경에서 염려하는 괴로운 사태까지는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단계는 넘어섰지 않은가? 이미 손까지 잡았고 가벼운 키스까지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자신이 없다.
김 교수는 박 교수 부인의 말이 생각났다. E여대 다닐 때 메이퀸이었다는 소문이 있는 박 교수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라고 한다. 그녀는 책도 많이 읽어서 세상살이와 인간의 심리를 잘 아는 모양이다. 박 교수의 부인이 남편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단다. “당신이 사회생활 하면서 술집에 가는 것은 좋다. 또한 술자리에 갔을 때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옆에 앉게 되고 술잔을 주고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어느 한 아가씨를 두 번 이상 계속 만나지는 말아라. 이것은 당신이 우리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 자신이 파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하는 나의 당부이자 경고다.”
김 교수의 아내는 이러한 경고를 하지 않았지만, 박 교수 부인의 기준을 적용하면 김 교수는 이미 위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빠떼루를 받은 것이다. (필자 주: 빠떼루는 오직 윗몸만을 써서 공격과 방어를 해야 하는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에서 소극적인 경기 운영에 관한 불이익으로 상대 선수에게 주는 것이다. 88올림픽 때 레슬링 해설가 김영준 씨가 주로 쓴 사투리다.)
그렇다면 법구경의 구절을 적어 보낸 것을 끝으로 아가씨와 헤어지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닐까? 그렇게 하면 자신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고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자체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윤리란 무엇이며 죄란 무엇인가?
아가씨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것과 그냥 이 단계에서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도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악수만 하고 헤어지면 괜찮고 육체적 결합을 하고 헤어지면 가정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하룻밤 사랑이 그렇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인가?
숫총각과 숫처녀의 하룻밤 사랑은 인생을 좌우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심각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와 아가씨가 함께 보내는 긴 하룻밤은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악수 한 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김 교수는 세상의 통념을 강력히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나라 남성의 75%가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잔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김 교수는 소수인 25%가 아니고 다수인 75%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김 교수는 그 전에 어느 소설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에서 활약한 유명한 기생으로서 뭇 남자들이 홀딱 반하는 그런 여자였다. 남자들이 줄줄 따르자, 자만심에 찬 황진이는 개성에서 훌륭하다는 두 남자를 유혹하고 싶었다. 한 사람은 절에서 수행하고 있는 지족선사(知足禪士)였고, 한 사람은 후진을 가르치고 있는 유학자 서경덕(徐敬德, 호는 화담-花潭)이었다.
26살의 황진이는 어느 날 56살의 서화담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여러 차례 서화담에게 육체적 사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서화담은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이 황진이의 욕구를 매정히 뿌리친다. 황진이는 서화담이야말로 진정한 도덕군자라고 감탄하면서 떠난다. 그 뒤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여 제자가 된다. 며칠 뒤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황진이는 요염한 자태로 지족선사의 방으로 쳐들어가 30년 동안 수행한 지족선사를 단 한 번에 무너뜨린다. 이튿날 아침에 황진이는 “지족선사는 별것 아니군”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절을 떠났다.
이 소설을 쓴 작가는 황진이의 시각에서 서화담을 칭찬하고 지족선사를 비웃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지족선사의 처지에서 다른 해석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래와 같지 않을까?
지족선사가 바라보니 황진이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색(色)의 괴로움이 역력하다. 이 여자를 그냥 두자니 색욕의 불꽃에 타서 미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괴로워하는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일종의 보시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보시도 있고,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주는 보시도 있다. 불교의 보시 가운데서도 가장 큰 보시가 몸 보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족선사는 황진이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하룻밤 사랑을 보시한 것이다. 황진이는 색욕의 불꽃을 끄고 만족하며 절을 떠났다. 황진이가 떠나자, 지족선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래의 수도승으로 되돌아갔다. 지족선사는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본다면 황진이를 끝까지 거절한 서화담보다는 지족선사가 한 수 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닐까? 지족선사는 원효대사가 말한 ‘무애(無碍,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도덕과 윤리의 기본적인 원칙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 지족선사의 행동이 윤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족선사가 황진이에게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니까.
서화담은 부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족선사는 부인이 없는 비구승이다. 황진이는 기생이다. 지족선사가 간통죄를 저질렀다는 말인가? 지족선사는 황진이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쾌락을 보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한다면 간통죄란 매우 어정쩡한 죄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간통죄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1998년 여름에 미국의 신문과 잡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클린턴 대통령과 여직원 르윈스키와의 백악관 정사도 간통죄가 아니라 위증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매춘도 마찬가지이다. 유교 윤리를 따른 조선시대에 매춘은 크게 죄라고 보지 않았다. 양반들은 살림살이가 넉넉해서 먹고 살 만하면 기생방을 드나들고 으레 첩을 두었다. 김 교수가 어렸을 때만 해도 첩을 둔 사람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아마도 기독교 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고서 간통죄가 신설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말에서는 간통을 ‘바람피운다’고 표현했다. 깊은 뜻이 있는 표현이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잠깐 불다가 멈추는 것이 바람이다. 심각하다면 심각한 것이 바람이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저절로 사그라지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이 죄라면 매우 어정쩡한 죄다. 대중가요의 가사에서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아름다운 죄’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 주: 간통죄는 우리나라에서 1953년에 제정된 형법 제241조에서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라고 규정하여 처벌했다. 그러나 성이란 사생활의 영역이며 국가가 나서서 범죄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간통죄 폐지론이 점점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대부분이 1970년대 이전에 간통죄를 폐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2015년 헌법재판관 7대2의 의견으로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면서 62년 만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