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현판은 참 매력적인 소재다.
건축물의 이름을 써 놓는 현판에는 건축물의 주인이나 당대 사람들이 지향했던 이상향과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다. 그들이 지향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도 되거니와, 글씨도 훌륭하여 예술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문학 전공자인 박진형이 쓴 이 책, 《멈추면 보이는 한 줄의 역사, 현판》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현판 15개를 역사적 이야기를 곁들여 풀어낸 책이다. 지은이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모으고, 한문으로 된 많은 문헌을 해석하여 풍부한 설명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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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소개된 현판은 서원에 임금이 써서 내린 어필 현판부터 한옥으로 된 성당에 걸린 현판, 송시열과 같은 대학자가 쓴 현판, 종갓집에 걸린 현판 등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현판 두 개는 순천 선암사에 걸린 ‘대복전(大福田)’ 현판과 남양주 봉선사에 있는 대웅전 첫 한글 현판, ‘큰법당’이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 있는 ‘대복전(大福田)’ 현판은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순조의 탄생은 무척 특별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병으로 잃고 후사를 근심하다가, 특별히 절에 세자 탄생 기도를 부탁해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p.120)
이러한 정성에도 왕자를 낳지 못하자 정조는 다시 1788년에 함흥의 석왕사와 순천의 선암사에 관리를 보내 세자 탄생의 기도를 부탁하였다. 부탁을 받은 선암사의 고승 눌암 스님은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은 대각암에서 각각 100일 기도를 하였다. 얼마나 정성으로 기도를 했던지 기도가 하늘에 닿아 이듬해 1790년(정조 14년)에 후궁 수빈 박씨가 순조 임금을 낳았다. …(줄임)… 그리고 다음 임금인 순조는 1801년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순조는 고마운 마음에 직접 “큰 복을 준 밭”이라는 뜻으로 금자(金字)로 ‘大福田(대복전)’이라 써서 현판으로 만들고 선암사에 내려보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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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연을 담은 ‘대복전’ 현판은, 한 나라의 임금이 자신의 출생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쓴 유일한 현판이다. 해서체를 써서 글씨에 힘이 느껴지고, 왕실의 적통을 지키게 해준 데 대한 진심 어린 고마움이 느껴진다. 순조는 ‘대복전’ 현판 말고도 ‘천(天)’과 ‘인(人)’이라 쓴 현판도 내려줬는데, 지금은 원통전 법당 안 정면에 대복전 현판이 걸려있고 ‘천’과 ‘인’ 현판은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봉선사는 한글 현판이 많은 절로 유명하다. 들머리에 있는 일주문에서부터 ‘운악산 봉선사’라고 두 줄 세로로 쓰여 있고, 대웅전에도 ‘큰법당’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큰법당 기둥의 주련(柱聯)도 한자가 아니라 한글이다.
한자 현판보다 훨씬 정감 있고 운치도 있다. 지은이는 지금부터라도 순우리말 한글 현판을 대중화하면 어색하지도 않고 오히려 친숙해서 좋을 것이라 말한다. 이 ‘큰법당’ 현판은 1970년 주지 스님인 운허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서예가 운봉 금인석 선생에게 부탁하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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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 스님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광복 이후에는 불교 경전을 한글로 뒤치는 일에 매진했다. 이런 불교 대중화 노력의 하나로 봉선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의 현판을 한글로 썼다. 우리나라 절 법당 가운데 첫 한글 현판이니,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절에 갈 때마다 한자로 적힌 현판을 보면서 무슨 뜻인지 몰라 어려웠던 기억이 많은데, 이렇듯 한글 현판을 달면 보는 이가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으니 참 좋은 것 같다. 봉선사처럼 한글 현판을 거는 절이 더 많아지는 것도 한글 사랑에 이바지하는 길일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현판을 자세히 보다 보면 고전에 대한 식견도 부쩍 넓어지는 느낌이 든다. 현판에 쓰인 글자는 대부분 고전의 시구에서 빌린 것이기 때문이다. 현판 안에 세계관이 담겨 있고 당대의 교양과 문화가 집약되어 있어 차분히 음미할수록 흥미롭다.
지은이는 ‘이야기가 있고, 가치가 있는 현판의 기록을 더이상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이 그 현판이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 말한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현판 하나하나가 하나의 큰 세계로 다가온다. 현판에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엮은 지은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