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인술을 베푼, 바보 의사 장기려

  • 등록 2025.03.17 1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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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의사 장기려의 청진기》 글 박그루, 그림 이지후, 밝은미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바보 의사.

한평생 우직하게 환자를 위해 살다 간 의사 장기려의 별명이다. 평생 재물이나 이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환자를 돌보며 살았던 그를 사람들은 ‘바보 의사’라 불렀다. 장기려는 이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남들이 자신에게 바보라 한다면 성공한 삶이라 여겼다.

 

박그루가 쓴 이 책, 《바보 의사 장기려의 청진기》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장기려’라는 인물을 알기 쉽게 풀어 쓴 그림책이다. 1995년, 8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인술을 베풀며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일생을 톺아볼 수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유난히 약했고, 배탈을 치료하느라 배꼽에 뜸을 너무 떠 배꼽 모양이 독특해질 정도였다. 할머니는 장기려가 튼튼히 자라라고 ‘금강석’이라고 부르며 늘 손자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인지, 그는 의술로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외과 의사가 되었다. 공대 시험에 떨어지고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학비가 저렴한 경성의전에 들어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수석 졸업을 할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갖췄다.

 

경성의전 졸업 이후 김봉순과 혼인하고, 한동안 경성의전 부속 병원의 외과학 교실에서 일했다. 이때 당대 으뜸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던 백인제 교수의 수제자로 일하며, 맹장염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촉망받는 의사로 경성에서 출셋길이 열려 있었지만, 자신이 경성의전에 들어가기 전에 평생 의사 한 번 만나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지키고자 평양으로 향했다. 그 뒤로 평양 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에서 외과 과장으로 일하며 1943년에는 간의 위쪽에 생긴 암을 잘라내는 절제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광복을 맞이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변함없이 평양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그러다 운명처럼 우연히 국군 장교의 설득으로 둘째 아들과 함께 군용 버스에 올랐다가 영원히 가족과 이별하고 말았다.

 

(p.21)

“그걸 막으려고 미국이 공중 폭격을 해서 평양 시내는 물론 장기려가 일하던 병원 건물이 부서지기도 했지. 장기려는 다친 환자들 진료에 여념이 없었어.”

“국군이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갈 때 장기려가 잘 알던 국군 장교가 와서 남한으로 피하자고 이끌었잖아요? 국군이 평양에 있는 동안 환자를 진료했기 떄문에 중공군과 북한군이 다시 내려오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면서요.”

“환자를 진료한 게 죄가 되다니!”“그러게 말이다. 장기려는 환자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군용 버스에 함께 올랐어. 그러다 창밖으로 둘째 아들이 지나는 걸 우연히 발견했지. 직원들이 아들을 버스에 태웠고, 장기려는 그대로 둘째 아들과 함께 부산까지 가게 된 거야.”

 

이렇게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간첩으로 몰려 뺨까지 맞는 심문을 당하면서도 미국 유학생 전영창의 도움으로 무료 병원인 ‘복음병원’을 세우고, 그 병원의 유일한 의사가 되었다. 누구나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복음병원은 피난민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전쟁 가운데 의료 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성껏 환자를 돌보는 장기려의 정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유엔 민사원조처에서 천막을 제공해 주고 경성의전 후배 의사인 전종휘도 진료를 도우면서 병원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무료로 환자를 보니 병원 형편도 열악했다. 결국 장기려는 월급을 식구 수대로 월급을 받는 것으로 바꾸었다. 식구 수가 가장 많았던 구급차 기사가 가장 많이 받았고 그다음이 전종휘, 그리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온 그가 가장 적은 월급을 받았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되자,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더 열심히 본업에 매달렸다. 자신이 남쪽에서 환자들을 잘 진료하면 북에 있는 가족들도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이때 그가 운영한 복음병원은 지금까지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으로 남아있다. 그는 1951년부터 무려 25년 동안 원장을 맡아 운영하며 부산대에 외과를 만들고, 1959년 2월 우리나라 처음으로 간암에 걸린 환자의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 업적으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는 항상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고자 애썼다. 떠돌아다니며 병이 든 행려병자들을 복음병원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이면서 치료해 주는 일이 많았다. 돈이 없는 환자들의 치료비를 해결하기 위해 채규철이라는 사람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고, 우리나라 첫 의료보험을 선보였다.

 

1975년에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운영하는 청십자병원을 세워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다. 1980년까지 가입자가 23만 명에 달했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진 해산했지만, 오늘날 전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탄탄한 의료보험의 바탕이 되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필리핀의 전 대통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인 ‘라몬 막사이사이상’의 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면서 한국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p.33)

난 언제나, 또는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그 동기가 좋고 방법이 정당하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뿐이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장기려의 수상 소감 중에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가족. 몇 번이나 이산가족 상봉 기회가 있었지만, 본인만 특권을 누릴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한 끝에, 마침내 1994년 남북고향방문단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교환 합의가 정부 차원에서 막판에 무산되자 충격과 슬픔으로 몇 달 뒤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p.37)

“그러니까 그 전에 만나셨으면 좋았을걸!”

선우는 안타까운 마음에 주먹으로 제 무릎을 내리쳤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타인을 생각하는 그 성품이 장기려의 훌륭한 점 아니겠니. 그나마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외국에 사는 친지를 통해서 북에 있는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는구나. 장기려와 김봉숙 여사는 편지에 사진도 넣어 보냈는데 너무나 달라진 서로의 모습에 한참을 울었다고 해. 꽃처럼 고운 부인은 할머니가 되었고, 반듯하던 청년은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그가 세상을 떠난 1995년 12월,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활발하게 진료하면서도 재산으로 집 한 채 남기지 않았다. 1985년부터 세상을 떠난 1995년까지 고신대학 복음병원 옥상 방에서 살았고, 통장에도 거의 돈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의 슈바이처’로 기억되고 존경받는 것에는 이런 헌신적인 삶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에 휩쓸려 가족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아픈 개인사를 딛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의술을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렸다.

 

요즘 더는 이런 헌신적인 삶은 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 같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 한때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고 희생하며 꽃피웠던 진짜 의사, 장기려. 그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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