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정현(柳廷顯)을 의정부 찬성으로 삼고, 유관(柳觀)을 의정부 참찬으로, 황희(黃喜)를 이조 판서로, 박신(朴信)을 병조 판서로, 윤향(尹向)을 형조 판서로, 성발도(成發道)를 판한성부사로, 심온(沈溫)을 호조 판서로, 정역(鄭易)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는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1415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 태종이 이조판서로 삼았던 황희(黃喜, 1363~1452)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세종이 그런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 뒤 황희는 단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 정승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하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라며 반박할 정도였지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임금 앞이라도 임금 비위를 맞추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던 황희를 늘 중용했습니다. 요즘도 이렇게 권력자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공직자 어디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