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작년 5월 몽골 울란바토르의 몽골국립도서관(관장 이친호라로 바얄쿠)과 기록유산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2025년 5월 20일 몽골국립도서관을 방문해 기록유산의 보존과 연구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1차 협력사업으로 이틀에 걸쳐 도서관이 처음 공개한 한국 고서와 관련 자료를 국내 처음으로 조사했다.
몽골국립도서관은 192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기관으로, 350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4년 새로 개관한 신관 10층에는 한국 관련 도서 약 7,000책이 소장돼 있다. 이 중 상당수는 1956년 북한과 몽골이 맺은 도서 교환 협정 이후 수집된 자료로 북한에서 펴낸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고전을 북한에서 번역한 희귀본들과 월북작가 박세영ㆍ이기영 등의 시집과 소설 등은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소중한 자료이다.

‘만호(晩湖)’ 김규식 장서인 확인, 독립운동가의 손때 묻은 서책
이번 조사에서는 중국고서로 분류돼 있던 책 가운데서 한국본 《연려실기술》 4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1912년 조선광문회 신문관에서 육당 최남선의 주도로 펴낸 초판본으로, 원집 24권 8책 가운데 3책과 별집 10권 4책 가운데 1책이 소장돼 있었다.
발견된 《연려실기술》 앞부분에는 ‘만호(晩湖)’라는 장서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 사용한 호다. 또한 ‘백산일송(白山一松)’이라는 또 다른 장서인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동삼(의성김씨 내앞 출신)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는 1911년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백두산 서쪽 통화현에 백서농장을 세우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백산’은 백두산의 약칭이기도 하고 김동삼이 거주했던 통화현 인근에 백산이라는 지역도 있다. 두 장서인이 함께 찍힌 이 책을 통해, 김규식과 김동삼이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사상적 교류나 실질적 연대를 나누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김규식과 몽골의 특별한 인연
김규식은 동래 출신으로,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입양되어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뒤 귀국하였다. 이후 참혹한 조국의 현실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동제사와 박달학원 설립을 통해 민족교육에 힘썼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일어난 직후에는 이태준, 서월보 등과 함께 울란바토르로 이주하여 비밀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생계를 위해 가죽 장사와 영어 교사로 일하는 한편, 미국 기업 앤더슨 마이어 몽골 지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세계열강에 독립을 호소했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 1944년에는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했다.
《연려실기술》은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30여 년에 걸쳐 집필한 기사본말체 역사서로, 우리나라 야사 문헌 가운데 으뜸 저술로 꼽힌다.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북돋는 정신적 지침서이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김규식은 1912년에 펴낸 이 책에 ‘만호’라는 장서인을 찍고 울란바토르로 가져가 교육 자료로 활용하며 민족 정체성을 되새겼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번에 확인된 장서인은 김규식의 삶과 몽골과의 인연, 그리고 독립운동사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는 뜻깊은 계기가 되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