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가물 꺼질 듯 피어나는 마음의 불꽃

  • 등록 2026.03.13 11: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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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눈길 너머로 떠오르는 삶의 무늬
[오늘의 토박이말]가물거리다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창가에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다 보면, 문득 아끼던 기억들이 바다 끝 너머로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했던 얼굴들이 시간의 먼지에 쌓여 모습만 남은 채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을 닮았습니다.

 

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아스라한 그림자들을 붙잡아두고 싶어 우리는 마음의 눈을 가늘게 뜨곤 합니다. 바쁜 나날에 가려져 잊고 지냈던 마음속 풍경들이 이토록 위태롭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듭니다.

 

 

'가물거리다'는 '불꽃이나 빛 같은 것이 꺼질 듯 말 듯 자꾸 약하게 흔들리다' 또는 '정신이나 기억이 흐릿해지다'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입니다. 이 말의 말밑을 생각해보면 작고 여린 움직임을 나타내는 '가물'에 같은 움직임이 되풀이된다는 뜻의 '-거리다'가 붙어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단순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 깜빡이는 생명의 힘이 담긴 표현이기도 합니다.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의 그 간절한 깜빡임, 혹은 잠들기 바로 직전 꿈결 같은 상태를 이보다 더 섬세하게 나타낼 낱말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연의 빛이 흐려지는 모습과 사람의 마음이 흐릿해지는 과정을 하나의 결로 바라보며 이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 쓰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또렷하고 확실한 것만을 옳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참모습은 때때로 똑 부러지는 논리보다는 가물거리는 기억의 조각 속에,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리움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곤 합니다.

 

가물거리는 불빛을 억지로 밝게 켜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흐릿함이 주는 넉넉함과 아련한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잊혀가는 것들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렸던 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아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흐릿해진다는 것은 아주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기억의 층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가물거리며 신호를 보내는 소중한 무언가를 가만히 지켜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을 위한 덤]

잊혀가는 소중한 순간들을 적바림하기 위해 오늘 하루 중 가장 아련했던 장면 하나를 짧은 날적이(일기)로 남겨보세요. 흐릿해진 기억의 실타래를 억지로 풀려 하지 말고 그 느낌 그대로를 마음의 사진첩에 담아두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어릴 적 할머니 옷에서 나던 포근한 냄새'나 '비 오던 날 창가에 비친 가로등 불빛의 번짐' 같은 것들을 글로 적어보세요. 서툰 글이라도 괜찮으니 그때 느꼈던 가물거리는 마음의 결을 자세히 그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지금 이 순간 가장 가물거리며 빛나고 있는 추억은 무엇인가요? 그 희미한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잠시 그곳에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오늘의 토박이말]

 ▶ 가물거리다

    뜻: 1. 작고 약한 불빛 따위가 사라질 듯 말 듯 움직이다.

        2. 물체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움직이다.

        3. 의식이나 기억이 조금 희미해져서 정신이 있는 둥 없는 둥 하다.

    보기: 저 멀리 바다 끝에서 고깃배의 등불이 가물거리며 깊어가는 밤을 지키고 있었다.

 

[한 줄 생각]

희미해진다는 것은 기억이 마음의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는 다정한 신호입니다.

 

 

 

이창수 기자 baedalmalji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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