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철학과 예언
머리 아닌 생명으로 터진 말 (심)
밝힘 밝게 배워 다시 밝힌 말 (돌)
궁리의 민낯 인과의 실타래 (초)
무지의 바다에 떠오른 말들 (달)
... 25.1.27. 불한시사 합작시
철학(哲學)이란 단순히 서양에서 말하는 개념적 체계나 사변적 사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지혜로 밝히는 학문이자 밝힌 것을 밝게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성인과 선각자들이 드러내 놓은 삶과 세계의 이치를 배우고, 그것을 다시 자기의 사유 속에서 밝히며, 나아가 더욱 실천적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축적과 성찰, 그리고 궁리를 통해 점차 심화하는 후천적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길에서 중요한 것은 묻는 일이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그러한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가운데 인과의 결이 드러나고, 복잡하게 얽힌 세계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린다.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학문이다.
이에 견줘 예언(豫言)은 다른 결을 지닌다. 예언은 배우고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 생명 깊은 곳에서 문득 솟아나는 직관의 언어다.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일의 기미를 먼저 감지하고, 그 흐름을 앞질러 말하는 것이 예언이다. 이는 논리적 추론 이전의 감응이며, 인과가 완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이미 그 방향을 짐작해 내는 지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이 “왜 그런가”를 밝히는 학문이라면, 예언은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먼저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는 인과를 따라가며 세계를 해명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길이다.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 다른 작용처럼 보이나,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하나의 밝은 지혜에서 비롯된다. 철학은 그 밝음을 배우고 익혀 지혜를 드러낸 것이며, 예언은 그 밝음이 생명 속에서 곧바로 터져 나온 것이다. 전자가 점진적이라면 후자는 즉각적이며, 전자가 논리의 질서를 따른다면 후자는 직관의 번득임을 따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예언만 있고 철학이 없으면 그 말은 근거를 잃고 흩어지기 쉽고, 철학만 있고 예언이 없으면 그 사유는 생명력을 잃고 형식에 머무르기 쉽다. 직관이 방향을 열고, 사유가 그것을 다듬어 길로 만든다. 이 점에서 철학과 예언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혜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두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생명에서 먼저 터지는 빛이 예언이라면, 그 빛을 따라가며 세계를 밝히는 길이 철학이다.
결국 인간의 참된 지혜는 이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먼저 감응하여 방향을 아는 힘과, 그것을 성찰하여 밝히는 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삶과 세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철학이 길을 밝히는 등불이라면, 예언은 그 길을 처음 비추는 번뜩임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이 하나로 이어질 때, 밝음은 단순한 인식의 학문에 머물지 않고 삶을 이끄는 힘으로 자리하게 된다.(무순의 혼하-渾河에서 라석)
|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