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조기태 기자] ‘필운대’는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던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 여기에는 이항복이 썼다는 “필운대”라는 글자가 암벽에 새겨져 있고 중간에 필운대를 소개한 글이 있다. 이글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9대손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글이다.
▲ 종로구 필운동 산 1에 있는 이항복이 썼다는 "弼雲臺" 글씨
우리 조상 옛집에 후손이 찾으니 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솔과 돌 벽에 흰 구름 깊네 蒼松石壁白雲深
남기신 풍모 백년 넘게 오래이니 遺風不盡百年久
노인장의 의관은 예나 지금이나 父老衣冠古亦今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선생의 필운대에 제하다. 癸酉 月城 李裕元題 白沙先生 弼雲臺)
▲ "필운대" 글씨 옆에는 이항복의 9대손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고종 10년에 썼다는 시가 세겨져 있다. |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필운 외에 백사(白沙)라고도 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방계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의 아들이다.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의 기지(機智)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오성과 한음)
병조판서, 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明)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폈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