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번 주 월요일은 휴일이었다. 주초부터 휴일? 그것은 하루 전 일요일이 한글날 공휴일이었는데 일요일로 쉬지 못하니 대체해서 휴일을 하나 더 내주었기에 휴일이 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직장인들은 사흘 연휴를 일주일 만에 다시 즐긴 셈이 되었다. 이렇게 연휴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글날이 공휴일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한글날을 공휴일로 기리게 된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주신 덕택이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 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베이셔도
마참네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할 노미하니라
내 이랄 윙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들 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뻔한킈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고등학교 시간에 배운 이 훈민정음 서문은 세종대왕이 이 새로운 글자를 만든 뜻을 천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아마도 많은 우리 국민은 다 외울 것이다. 정말로 백성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어려운 실정을 풀어주기 위해 새로운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을 만든 까닭을 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다만 이 글을 실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맨 뒤에 댱시 예조판서인 정인지가 이 어제서문(왕이 쓴 서문)을 풀어주는 서문이 첨가해서 붙어있는데 보통 일반인들은 그 뒷부분의 서문까지는 잘 읽지 않는다.
그런데 그 정인지의 서문을 보니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든 뜻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물론 이 글에 대해서는 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풀이했고, 필자가 존경하는 수원대 김광옥 교수님도 올해 초에 <우리문화신문>에 세종대왕에 대해 칼럼을 쓰시면서 언급한 적도 있어서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필자는 마침 한글날을 며칠 앞두고 이 글을 접하게 되어 당시의 세종대왕 뜻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서문은 임금의 이름으로 된 앞부분 서문이나 정인지가 쓴 서문 모두 세계 문자역사상 유일하게 문자 창제 선언서이다. 정인지의 서문의 앞부분은 나라마다 소리가 다른데 그 다른 소리를 표기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점을 부연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새롭게 주목한 것은, 훈민정음을 만들 때까지도 설총이 만든 이두를 생활 곳곳에서 써왔다는 점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장은 중국에 견줄 만하나, 다만 이 지방에서 쓰는 말은 서로 같지 않다.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것을 걱정하고 감옥형벌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을 서로 통하게 하기가 어렵다고 끙끙 앓는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관청이나 민간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려다 쓴 것이어서, 때로는 이해가 잘 안되거나 막혀버려, 비단 막히고 어설플 뿐 아니라, 우리 말과 글자 사이에는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 없다.
그리고 새로 만든 글자들이 음양과 천지인이라는 삼재의 사상을 담아 세상에서 유례가 없는 정신적인, 사상적인 철학을 표현한 글자이며, 그것으로써 비단 배우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문자임을 만든 사람들 자신도 놀랄 정도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상세하면서도 잘 통하는 까닭에 영리한 이는 아침나절이 지나기 전에 이를 꿰뚫고, 어눌한 사람도 열흘이 되면 배울 수 있다. 이로써 글을 이해하여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자세히 듣고 판단하면 그 실정(實情)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글자의 음운(字韻)은 맑거나 흐림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고, 음악과 노래로(樂歌)는 음률(律呂)이 충분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어느 것에 쓰든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디에서든 전달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하물며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적을 수가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정인지의 서문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는 창제 목적 이외의 목적도 알게 된다. 즉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 등 송사를 당하면서 이를 제대로 전하고 기록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눈 사랑의 마음이다. 그 다음에는
"글자의 음운(字韻)은 맑거나 흐림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고, 음악과 노래로(樂歌)는 음률(律呂)이 충분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라는 귀절이 보이는데, 그것은 당시 지도층들이 쓰는 한자, 한문의 경우 청음과 탁음, 사성 등의 발음이 있는데, 그동안 한자를 배우면서 그것을 충분히 구분해서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했는데. 새 문자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니 우리 말을 기록하고 통하는 것 말고도 당시 사회에서 꼭 필요한 한자 한문의 제대로 된 학습을 위해 훈민정음이 얼마나 요긴한가를 밝혀주고 있다. 당대로부터 미래에까지 이어질 문자체계의 탄생, 그것이다.
이렇게 세종이 눈병을 앓아가면서도 온 힘을 다하여 마침내 만든 훙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체계를 일상에 쓰게 하도록 정인지를 비롯해서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 등 집현전의 영재들의 머리를 다 짜내어 그 용례를 찾아내고 예를 들어주는 작업에 애를 썼음을 알려주면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인류사의 큰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임금을 뛰어넘으셨다. 정음 창제는 앞선 사람이 이룩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니요,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다.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아주 많으며, 사람의 힘으로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다.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무릇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온전하게 이루게 하는 큰 지혜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알고 있지만, 정인지가 쓴 서문을 통해 대왕이 이룩한 이 문자창제가 그리 큰 뜻이 있음은 필자도 뒤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대왕의 큰 뜻을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또 느끼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는 좋은 목적으로 영민할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고, 그 뜻을 국민이 잘 받으면 이런 세기적인 업적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은 지금 우리 시대의 지도자와 우리 국민의 자세에 아쉬움이 많다는 뜻이다.
지도자는 영민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대단하고 자신의 판단이 늘 맞는다는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늘 남의 말, 남의 식견과 지혜에 귀를 기울여 자기 잘못을 고쳐야 하고, 현실의 제약을 넘는 미래의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생성된 비전으로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국민은 생각과 지혜를 모아서 함께 나아갈 일이다. 물론 지도자가 잘 못 하는 것은 우리는 언론이라는 제도로 감시하고 선거라는 제도로 지도자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언론이나 정치 공론은 허구한 날 서로 소소한 잘못이라도 물고 늘어지는 데에 진력하고 있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우리 전체의 진로나 방향을 찾는 일은 꿈도 꾸지 않는 것 같다. 그 옛날 새종대왕이 새로운 문자창제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정신의 자유와 새 사상의 지평을 열어주었는데, 요즘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은 무엇을 열고 보여주려 하는가?
그저 하루 공휴일을 더 받았으니 좋다고만 할 일이 아니라, 이런 휴일은 정말로 우리의 앞길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우리 함께 찾아야 할 이 시대의 '훈민정음', 아니 이 시대의 '한글'은 뭇엇인가? 한글날이 공휴일이 된 것은 세종대왕의 경륜과 지헤와 큰 뜻을 우리나라의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든 이들이 배우고 함께 고민하자는 뜻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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