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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공학’은 무엇인가?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전번 이야기에서 ‘한글20’은 기본자음과 기본모음이 각각 10개씩이라 이들에게 수치 기호를 붙여 한글문서를 간단히 수치화할 수 있고 이는 곧 인간의 말소리를 수치화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소리를 수치화하는 것은 녹음기의 핵심기술입니다. 따라서 한글20은 녹음기에 비교되는 고도의 기술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한글20’은 녹음기보다 한 차원 높은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녹음기는 소리의 저장과 재생이 기술 전부지만, 한글20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문서화 기술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한글20은 엄청난 기술적 가능성을 가졌으며 이러한 기술을 연구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쓴이는 이 분야를 한글공학이라 이름하고 2010년 KAIST에 한글공학연구소를 만들어 5년 동안 연구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한글공학의 범위 한글공학의 범위는 한글공학연구소의 첫 과제에서 그 윤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제의 목적은 ‘시각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는 만국어 컴퓨터 문자입력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듣기에 실현이 가능한 과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만국어를 입력하는 자판을 만들어 낼 것이며 거기에다 시각장애인까지 쓸 수 있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촉각을 이용하는 방법은 애초에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우선하는 연구임에도 촉각을 배제한 것은 일반인과 함께 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촉각에 의지하는 점자가 오히려 시각장애인과 정상인을 격리하는 역작용을 한다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점자의 역작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결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이 과제가 풀어야 할 기술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언어라도 입력할 수 있는 문자 입력시스템 개발 2. 자판을 보지 않고 입력할 수 있어야 함. 단 촉각 이용은 배제 3. 출력은 해당 언어의 철자법에 맞도록 해야 함 1번 과제, 곧 세상의 모든 언어를 그들 고유의 문자로 입력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글자 대신 말소리를 통해 입력해야 할 터인데 소리를 직접 입력하는 것은 연구목적에서 배제되어 말소리를 글자로 표기하여 입력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세상 모든 언어의 말소리를 글자와 기호로 표기해 주지만 140여 개에 달하는 글자와 40개가 넘는 부호를 수용할 자판을 만드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행히 ‘한글20’은 어떤 언어라도 발음을 표기할 수 있으므로 ‘한글20’을 위한 자판을 만들면 해결될 일입니다. 2번 과제, 곧 시각장애인이 촉각을 사용하지 않고 입력하는 자판은 이미 존재합니다. 곧 자판의 글자 단추가 고유의 소리를 내도록 하여 그 소리를 듣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를 입력하려면 ‘ㄱ’ 소리를 내는 글자단추와 ‘ㅏ’ 소리 나는 단추를 찾아서 누르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쿼티 자판에서는 가능할 수 있지만 손말틀(휴대전화) 자판에서는 하나의 글자 단추가 여러 개의 소리를 내야 해서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과제는 슬기말틀(스마트폰)을 사용하되 쿼티자판은 글자 단추가 너무 작아져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해결 대안으로 ‘한글20’을 위한 자판을 새로 개발하여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아래 그림1은 그 얼개를 보여 줍니다. 10개의 자음단추에 기본자음을 배치하고 모음단추는 천지인의 3개 단추를 5개로 늘려 합자가 빠르도록 배치한 것입니다. 모음을 실제로 표기하듯 순서대로 천지인을 누르면 됩니다. 3번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위 그림2에 보인 다언어 DB (이 경우 5개 언어)를 내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DB의 각 셀(cell) 윗줄은 해당 언어들의 철자법이고 아랫줄은 발음의 한글 표기입니다. 해당 언어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여 입력하면 이 DB에서 같은 한글표기의 낱말(어휘)을 찾아 그 위에 있는 철자법을 출력하여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쉬에ᄰᅥᆼ’ 이라는 입력이 들어오면 가장 가까운 발음을 찾고 그 위에 있는 学生을 출력해 보입니다. 이 기술은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과제가 끝나 시각장애인이 시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옆에 서 있는 연구원이 입력하는 내용을 화면에 중계하고 있습니다. 이 시연으로 연구목적이 기술적으로 실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용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한글공학을 보급하기 위한 전략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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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우리에게 이런 사진가가 있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술사진을 순위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자존으로, 첫 개인전의 역사를 연 사람 “정해창 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 있는 사진 50여 점을 가지고.... 작품 전람회를 개최한다는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 중에도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 우리나라 첫 사진 개인전에 대한 1929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 일부다. 공모전이나 단체전의 개념밖에는 없던 시절, 예술사진가로서 자신의 작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조선사람 정해창은 한 번도 공모전 등에 사진을 출품한 적이 없었다. 예술사진은 다른 사람에게 순위가 매겨져 평가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1929년 3월 광화문에 있던 광화문빌딩에서 ‘사진 개인전’이라는 작품발표 형식을 처음 선보이며 <정해창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를 열었다. 정해창이 개인전을 갖기 이전까지, 초창기 사진과 전시는 영업사진관과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어느 한 개인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모아 개인전을 여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정해창이 한국사진사에서 ‘개화자(지혜가 열려 새로운 사상, 문물, 제도 등을 갖게 된 자)’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사진 개인전을 시작으로 10년여 동안 순수한 작가적 열정이 가득한 사진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풍경, 정물, 인물 등 장르 구분이나 기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사진화학 연구를 통해 여러 원리를 사진에 응용코자 한 것도 그런 자유로운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무, 카본, 브롬오일 등의 인화법을 습득했으며 비단 위에 감광제를 발라 사용할 수 있는 ‘실크브로마이드’ 연구에 성공해 특허를 내기도 했다.** 1939년까지 모두 4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세상에 내어 보인 정해창의 사진들은, 현재 ‘1920~30년대 우리나라 예술사진의 다양한 흐름 가운데 거둔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무허 정해창이 손수 제작한 밀착본 사진들이 100년 만에 복원되어 우리 눈앞에 한국사진사에 뚜렷한 발자국과 함께 정해창은 약 120점의 유리건판과 300여 점의 밀착본을 한국 사진의 유산으로 남겼다. 또한 사진을 작가주의적 시선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사진을 스스로 ‘살롱픽춰(전시를 위한 예술사진이라는 의미에서)’라 불렀듯이 그 시대에 벌써, 오늘날 사진가들이 사진집 출판이나 전시를 앞두고 만드는 ‘더미북(dummybook_가제본책)’을 직접 만들었다. 사진들을 선별해 4*6 정도의 사이즈로 밀착 인화한 뒤 책 형태로 편집한 것이다. 이번 전시 <살롱픽춰>는 정해창의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던 위의 유산들을 프린트마스터 유화(유화컴퍼니)가 100여 년 만에 복원함으로써 가능했다. 밀착본을 고해상 디지털카메라로 복사촬영(사진가 박명래)한 뒤, 미세한 농도 차이를 토대로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지난한 복원작업이 2021년부터 꼬박 2년여에 걸쳐 이어졌고, 1차로 복원된 70여 점의 사진들을 이제 전시로 선보이는 것이다. 6월 6일부터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1, 2관에서 열리는 무허 정해창사진전 <살롱픽춰>에서는, 100여 년 전 사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현대적인 감각의 ‘풍경사진’과 ‘정물사진’ 모두 70여 점이 전시된다. 나라 밖에 소개하기 위해 영문으로 먼저 펴낸 사진집(디자이너 서민규)이 전시 현장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 한국사진사 ** 정해창 100주년 사진집 ***한국사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