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느덧 <노래 꽃 피는 마을>이 연재 70회를 넘었다. 이즈음에서 간략하게나마 우리 가요사의 개괄적 정리를 해 두고자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불리는 대중음악을 ‘가요’, 외국(영·미)의 대중음악을 ‘팝’이라 한다. 하지만 위의 용어들은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그러면 우리 가요는 언제부터 ‘가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가요’라는 용어는 1970년대부터 일반화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유행가’라 했었고, 그 이전엔 ‘유행창가’ 또는 ‘창가’라 했었다. 그렇다면 창가를 우리 대중음악의 시원(始原)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은 창가를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이들도 있으나 너무 포괄적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1027년에 나온 ‘낙화유수’를 최초의 가요 곡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필자 역시 후자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렇긴 하나 노래를 부른 이정숙이 동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여서 그녀를 최초의 유행가 가수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많은 연구자들은 1930년에 ‘봄노래 부르자’로 등장한 채규엽을 최초의 유행가 가수로 꼽고 있으며, 최초의 인기곡으로는 1932년 작 ‘황성의 적’(가수;이애리수)을 꼽는다.
▲ 강홍식 음반 표지 |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 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 타령이 절로난다
호미 들고 밭가는 저 총각의 가슴에도
봄은 찾아 왔다고 피는 끓어 울렁울렁
콧노래도 구성지다
멋들어지게 들려오네
봄 아가씨 긴 한숨 꽃바구니 내던지고
버들가지 꺾드니 양지쪽에 반만 누워
장도든 손 싹둑싹둑
피리 만들어 부는 구나
노래 실은 봄바람 은은하게 불어오네
늙은 총각 기막혀 호미자루 내던지고
피리 소리 맞춰 가며
신세타령을 하는 구나
‘처녀 총각’ 중
이렇게 시작된 우리 가요는 짧은 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1930년대 중반에 벌써 황금를 맞는다. 하지만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로 군국가요 제작에 열을 올린 까닭이다. 거기에다 광복과 함께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철수해 버리자 우리 가요계는 극심한 침체기를 겪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긴 암흑기를 맞게 된다.
그 뒤 국가재건의 바람을 타고 1960년대에 재도약을 한 가요는 여러 가지로 갈래를 치며 장르를 다양화 하여, 오늘 날에는 세계 대중음악계를 주도 할 만큼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오늘은 ‘대중예술의 르네상스’라 불리었던 1930년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처녀 총각’을 들으며 과거 여행을 떠나본다. 북한의 ‘공훈 예술가’ 강홍식은 190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무용을 배우고 돌아와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약하다 ‘눈물의 여왕’ 전옥과 결혼하여 딸 강효실을 낳았다. 전옥과 헤어진 뒤 딸을 데리고 북으로 가서 활동했다.
강효실은 6·25 때 북진한 국군을 찾아가 문예대를 따라 내려왔다. 뒷날 최무룡과 결혼하여 최민수를 낳아 연예가족을 이루었다. 강홍식은 1971년에 평양에서 별세했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