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중학교 1,2학년은 다니지 못하고 3학년으로 들어가 1년 다니고 졸업을 했지요. 아버지가 6.25때 보성경찰서에 끌려가 51살의 나이로 학살당하실 무렵 저는 겨우 9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막내 동생을 임신 중이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저는 또래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에 다닐 때에 신문팔이, 비누장사, 식모살이 등을 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래도 교육가이셨던 아버지를 떠 올리며 이를 악물고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장흥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3학년에 편입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지요. 간단한 테스트를 거쳤지만 충분히 3학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판단 했는지 교장선생님은 저를 3학년에 편입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
이는 항일민족교육자인 학산 윤윤기(1900.7.9~1950.7.22) 선생의 둘째 따님인 윤종순 여사(76살)의 말이다. 윤 여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교장선생님의 권한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비명에 가셨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초면의 교장선생님을 찾아 간 것이지요. 김채주라는 교장 선생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
13살의 당당한 중학생 윤종순은 어려운 고비마다 “내가 누구 딸인데...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으로 버텨나갔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이야기지만 윤 여사는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도 1,2학년을 건너뛰고 3학년에 편입하였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소녀 가장이었기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1,2학년 과정을 건너 뛰었으니 남들보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했다. 물론 중학교 때와 같이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3학년에 편입시켜달라고 당당히 말했던 것이다.
지난 8월 25일(금) 오후 1시, 서울에서 달려간 기자는 전남 광주의 한 식당에서 윤종순 여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 학산 윤윤기 선생의 제자인 김순님(89살)과 오기순(87살) 여사도 동석했으며 광주교육대학교 김덕진 교수도 함께 했다.
“제가 이 분들을 오시라고 했어요. 특히 아버지의 제자인 김순님 씨와 오기순 씨는 아버지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분들이라 기자님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불렀습니다. 그리고 김덕진 교수님은 학산 선생에 대한 연구가 깊으신 분으로 마침 일본에 다녀왔다면서 인사차 전화를 걸어와 함께 점심이라도 들고자 모셨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도착하는 바람에 연로하신 분들께서 시장하셨겠다 싶었다.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모두들 주문한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치우고 조용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윤 여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백년편지》(2016)를 편집한 사람으로 당시 윤종순 여사의 애절한 편지 한 토막을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던 터라 윤 여사의 이야기가 더욱 실감났다.
“아버지! 얼마나 원통하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철사 줄에 묶여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모습의 아버지 주검을 보아야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더구나 어머니는 임신 중이셨으니 그 한 많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학살 이후 어머니도 오래지 않아 생활고로 인한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막내 유복녀와 남동생의 가장이 되어 억척스럽게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고비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 삶의 등불이 되어 가시밭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윤종순 여사의 아버지인 학산 윤윤기 선생은 일제강점기 전남지역에서 민족교육의 선구자로 활약했던 분으로 남강 이승훈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을 능가하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는 분이다. 보성 출신인 학산 선생은 전남공립사범학교강습과(현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한 뒤 안양공립보통학교, 천포간이학교, 보성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교사 생활 15년을 채우면 평생 연금인 ‘은급(恩給,일제강점기에 정부 기관에서 일정한 기간 일하고 퇴직한 사람에게 주던 연금)’을 받아 그런대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음에도 학산 선생은 1달을 앞두고 민족교육에 투신하고자 사표를 냈다. 그리고 1939년 보성군 회천면에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을 세웠다. 양정원은 월사금을 한 푼도 받지 않는데다가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말하자만 학산 윤윤기 선생이 세운 양정원은 한국 최초의 무상교육기관인 셈이었다. 양정원은 1947년 폐교할 때까지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에 앞서 1933년에는 천포간이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작하였다.
“저는 4학년 때 학산 선생님에게서 배운 제자입니다. 들어가자마자 히라가나부터 가르쳤는데 시가츠와 하루노 하지마리다(4월은 봄의 시작이다)라는 교과서 구절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독부에서 낮에는 일본말을 가르치도록 지침을 받으셨는지 학산 선생님은 밤에 따로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헌 책이긴 해도 산수, 국어와 같은 책을 구해다가 우리들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오기순( 87살) 제자는 학산 선생님이 운영하던 야학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김순님 (89살) 제자 역시 스승 학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3학년 때 학산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지만 양정원에서 무료 교육을 시켜 주는 바람에 한글을 깨칠 수 있었지요. 그때 학교는 건물을 짓고 있을 때라서 우리는 학교 뒤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몇 달 뒤 완공된 건물이 태풍에 폭삭 주저앉아 버리자 학산 선생님은 피를 토하며 부서진 건물을 다시 세우느라 불철주야 고생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들도 수업이 끝나면 학교의 담장과 화단을 만드느라 학교 앞 바닷가에 가서 잔돌들을 머리에 여 날랐지요”
구순의 나이가 가까운 학산 윤윤기 선생의 두 제자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용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는 입만 열면 조선인의 교육을 자신들이 제대로 시켰다고 궤변을 떨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학산 윤윤기 선생처럼 사설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쳐 온 곳이 산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교육 외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중학교 1년, 고등학교 1년 만으로 각각 중고교 졸업장을 받아 쥔 당찬 소녀 윤종순은 대학만은 정식 절차를 받아 들어갔다. 서라벌대학 문예창작과를 10회로 졸업했으니 당시 여자로서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고학생이자 소녀 가장의 삶은 바뀐 게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도 해보았어요. 일자리가 변변치 않을 때는 매혈(피를 뽑아 팜)이라도 해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
아버지 학산 선생은 해방 전까지 몽양 여윤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건국동맹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계열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여운형의 암살과 이승만 이 정권을 쥐는 관계로 뜻이 꺾였다. 좌와 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에서 갈라선 민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던 선생은 6.25 전쟁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22일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향년 51살이었다. 이러한 참상을 9살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비극적이었고 어린 나이였다.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어드리는 게 저의 마지막 남은 소원입니다. 아버지는 광복 이전에 천포간이학교와 양정원을 세워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전재산을 교육 사업에 쏟아 부었으며 온 몸으로 민족 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었는데 일제 경찰에 살해당한게 내나라 경찰의 손에 처참히 살해 당하셨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아울러 아버지의 항일독립운동과 무상교육,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한 업적을 인정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죽기 전에 말입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대목에서 윤종순 여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말끝을 잇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공립학교 교사생활 15년만 채우면 평생 연금이 나올 자리를 1개월 앞두고 박차고 나와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헐벗은 아이들을 위해 천포간이학교와 양정원을 세웠던 아버지! 우리나라 최초의 무상교육을 실시한 민족교육자 학산 윤윤기 선생과 그 가족의 피눈물 나는 고통스런 삶에 대해서 이 사회가 눈감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 2013년 10월 22일 오후 2시에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 앞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학산 윤윤기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연 것이다. 광주교육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민족교육의 선각자인 선생을 광주교육대학교가 사표로 삼아 흉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당시 제막식에 참석한 기자는 광주교육대학교 이정선 총장의 축사를 기억하고 있다. “광주교육대학교가 있기에 민족 광주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민족교육자 학산 선생의 흉상을 모시게 되어 기쁘다. 우리는 이제 민족교육의 선구자이신 학산 선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고 또 그런 교사를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전당으로 북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오산학교가 있었다면 남에는 학산 윤윤기 선생의 양정원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성학교를 세운 도산 안창호 선생 못지 않게 전남지역의 민족교육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교육자요, 항일독립운동가였던 학산 윤윤기 선생은 그러나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기자님, 전화 끊으세요. 전화요금 올라가니 제가 다시 걸랍니다.” 윤종순 여사는 기자가 건 전화 통화에 그렇게 말했다. 작은 일에도 남을 배려하는 심성을 지닌 윤 여사는 지금 갑상선 기능 저하증 등의 병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곧 팔순을 바라다보는 학산 선생의 둘째 따님은 이 나라 경찰에 의해 비명횡사 하신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교육의 선구자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가 하루빨리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