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음력 6월에 조선에서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는 답방사를 뜻한다. 이들은 9월 2일 이른 아침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제물포항을 떠난 지 한달 반 만이었다. 9월 18일 오전 11시쯤, 민영익 등 사절단은 뉴욕 5번가 호텔의 대귀빈실에서 아서 백리세천덕[대통령 곧 프레지던트의 음역]를 만나 알현례을 거행했다. 일행은 민영익의 신호에 따라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백리세천덕 [대군주] 알현례[謁見禮]
“이런 예[禮]는 임금이나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한다. 그 외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대군주에 올리는 고유한 예절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감격해 했다 아마도 미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최초 사례일 것이다 왜냐면 그보다 20년 전 왜인 사신은 서양식 입례[立禮]로 임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서양식 접견례가 진행되었다 먼저 대기실에선 사모관대의 조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데 삼 사신[정사, 부사 종사관]이와 또 한 사람의 뒷모습은 누군지 알 수 없다. 국무장관 소개로 악수례가 진행되었다 국서와 신임장은 뒤에서 들고 있다.
미국의 조야에서는 이런 절차와 의상에 환호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다투어 보도하였다 그러나 보빙사 알현례 의상과 모자의 양식은 약간의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조선통신사의 경우는 양관에 홍색 조복이고 양관엔 5줄이 있어 당상관 품계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군주 알현례
대군주 배알은 계수(이마가 땅에 닿도록 겸손하게 절하는 것) 4배이고 이는 망궐례[望闕禮]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접 대면하는 알현례는 고두(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던 예) 1배를 더한다. 보빙사는 직접 배알보다 알현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의관
전권대신[正使]에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부대신[副使] 홍영식(洪英植, 1855~1884), 종사관[서기관] 서광범(徐光範, 1859~1897) 등이 3사[使]이다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과 중국인 오례당, 미국인 퍼시벌 로웰, 일본인 미야오카 등이 수행했다. 모두 11명이었다.
보방사는 모자가 양관이 아니라 2층 정자관이다 왜 그런지는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북향 4배
배알례는 북향 4배를 한다 영조 때 조선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이 대한 해협 일지도 취위루에서 동지 망하례(望賀禮,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에 고을 수령이 전폐-殿陛 곧 궁전이나 누각 따위의 섬돌에 절하던 예식)를 거행했는데 고국 쪽 서편으로 향하지 않고 북향으로 한 것이 기록으로 전한다 대군주가 계시는 곳은 북향이다 이는 군주는 오직 하나이고 이는 북극성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신하는 북두칠성처럼 북극성 주위를 돈다는 의미이다. 북극성과 칠성 신앙의 연관성이다 그리므로 항상 북향으로 절할 수밖에 없다.
맺음
보빙사[報聘使]의 전명 알현례[傳命 謁見禮]는 동방예악 사상의 진수이다 왜냐하면 민족 고유의 칠성 신앙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개화세력들이 주장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 동양의 도를 지키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임)를 미국에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현례는 전통례를 고수했지만 전명 알현[제정식]에는 서양식 입례{立禮}로 행하여 상대방을 존중했다 혹 절충식이라 평가하겠지만 절충보다는 평등 의식의 발로이며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들은 우리 식을 몰랐기에 한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현재 기록들은 땅에 코를 박을 만큼 큰절을 했으며 황당무계한 미개인 행동으로 매도하고 있다 자신은 무슨 절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른 체 엉뚱한 추정으로 매도하고 심지어 양이[洋夷]라고 깔보고 일부러 머리를 틀었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