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로스앤젤레스 이윤옥 기자] “외할머니(차인재 지사)는 매우 억척스런 분이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새크라멘토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셨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초인적인 일을 하시며 돈을 버셨지요. 그렇게 번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신 것이지요. 제가 8살 무렵에 한글교실에 다녔는데 이것은 외할머니의 영향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차인재(1895-1971, 2018년 애족장)지사의 외손녀딸인 윤패트리셔(한국이름 윤자영, 71살) 씨가 한 말이다. 8월 13일(현지시각) 저녁 7시, 기자는 차인재 지사의 외손녀 윤패트리셔 씨가 살고 있는 헌팅턴비치의 조용한 단독주택을 찾았다. 윤패트리셔 집은 기자가 묵고 있는 LA코리아타운으로부터 승용차로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헌팅턴비치 주택가로 이곳은 정원을 갖춘 2층짜리 집들이 즐비한 곳으로 조용하고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방문 전에 기자는 전화로 미국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유적과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고 외할머니(차인재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외할머니 사진은 제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만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해드릴게 없습니다. 취재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해서 내심 걱정하며 찾아간 윤패트리셔 씨는 칠순의 나이에도 생각보다 달변가였다.
윤패트리셔 씨는 찾아간 기자를 위해 커다란 유리컵에 얼음을 동동 띤 냉수를 내왔는데 유리컵을 테이블 위에 놓자마자 기자는 며칠 전 윤패트리셔 씨의 외할머니(차인재, 미국이름 임인재)와 외할아버지(임치호)가 묻혀있는 LA 로즈데일무덤에 다녀와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외손녀는 자기도 자주 가보지 못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무덤을 다녀왔다며 고맙다는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외할머니와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주로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한국말을 배우게 하려고 현지 ‘국어학교(한국인학교)’에 보낸 이야기, LA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던 외할머니가 억척스럽게 부(富)를 일군 이야기, 당시 미국 여자들도 운전하는 여자가 드물던 시절에 운전면허를 따서 손수 운전하던 이야기 등등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실타래 풀듯 풀어 놓았다.
한 30여분만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생각한 대담은 2시간이 넘도록 끝나질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윤패트리셔 씨는 독립운동가 외할머니에 대해 “아는 이야기 없는 게 아니라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머니(1971년 숨짐) 살아생전이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고국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독립운동 이야기를 물어 온 사람이 없었기에 외손녀인 윤패트리셔 씨는 외할머니의 독립운동이 크고 중요한 일인 줄은 잘 몰랐던 것이다.
차인재 지사는 남편 임치호 지사의 성을 따라 미국에서는 임인재로 통하고 있었다. (무덤 표지석에는 림인재) 차인재 지사는 1920년 8월, 25살의 나이로 미국행을 선택했는데 그 계기에 대해서 외손녀인 윤패트리셔 씨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외할머니가 이화학당을 나온 것 말고는 한국에서 무엇을 하다 오셨는지 모른다고 궁금해 했다. 오히려 기자에게 외할머니의 ‘조선에서의 삶’을 물었다.
기자가 묻고 싶은 말을 되레 후손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꼴이다. 차인재 지사는 이화학당을 나와 수원 삼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0년 8월, 돌연 미국행을 택하게 된다. 삼일여학교 교사였던 차인재 지사가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간 계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미국행을 택한 정황을 생각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그 정황이란 다름 아닌 수원의 삼일학교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인 <구국민단>에서의 활동이다.
<구국민단>은 당시 박선태(1990, 애족장) 지사가 주도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로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선태 지사는 1919년 9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가려다가 삼일학교 교사 이종상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1920년 6월 20일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에서 차인재 지사는 교제부장을 맡았으며 독립신문,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련한 신문을 국내에 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를 주도한 박선태 지사는 얼마 되지 않아 일경에 잡히고 만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920년 8월 20일 <동아일보> 에 ‘학생구국단 검거, 휘문 학생 박선태 외 5명, 그 중에는 차인재 등 여학생도 4명 포함’ 이란 제목의 기사 내용이다. 이 기사에는 당시 <구국민단>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들의 검거 소식이 적혀있는데 기록을 보면 차인재 지사는 교제부장으로 되어 있으며 “본년7월래도미(本年7月來渡美)”라고 적혀있다. 궁금한 것은 바로 이 대목 ‘본년7월래도미(本年7月來渡美)’라는 부분이다.
차인재 지사가 검거되기 전에 7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인지, 7월에 검거되어 구류를 살고 8월에 건너갔다는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을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사항을 윤패트리셔 씨가 알고 있었다면 좋을 텐데 외할머니(차인재 지사)는 전혀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한편 차인재 지사가 미국에 건너가 바로 활동한 기사가 1921년 4월 7일치 미국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에 실려 있어 첫발을 디딘 미국에서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임치호씨 부인 교육 열심’ 이라는 제목으로 차인재 지사는 당시 캘리포니아 맥스웰에 살았으며 교포자녀들을 위해 ‘국어(조선어)학교 교실’을 만들어 교육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유달리 차인재 지사는 ‘국어(조선어)교육’에 열의를 보였는데 그것은 딸과 손녀인 윤패트리셔 씨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8살 무렵 어린 윤패트리셔는 한글을 읽고 쓰는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이어가지 못한 윤패트리셔 씨는 미국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여 약사로 한평생을 지내느라 한국어는 8살 때 배운 실력에서 멈추어 있었다. 통역 없이는 독립운동가 후손과 올바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동포 2세, 3세의 현실이고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날 통역은 샌디에이고에서 교사로 있는 이지영 기자가 맡아 수고해주었다.
“외할머니는 이 집안에 태어나는 자손들이 돌(1살)을 맞이할 때는 언제나 한복을 입히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문화를 이어가길 바라신 거지요. 어려운 이민자의 삶속에서 외할머니는 식료품 가게 등을 경영하면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기금을 내시고 국어교육을 실천하시는 등 강인한 정신력으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가 존경스럽습니다. ”
윤패트리셔 씨는 차인재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기자를 만나 마음속에 담아왔던 그간의 회한을 쏟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대담을 마치고는 집안 거실에 놓인 2단 짜리 반닫이 등 집안 구석구석에 장식해 둔 한국 물건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자신 역시 칠순의 나이가 되었지만 외할머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뿌리임을 잊지 않고 있는 윤패트리셔 씨와의 만남은 기자에게도 뜻깊은 시간이었다.
윤패트리셔 씨의 외할머니 차인재 지사는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學務員),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 1935년 서기, 1936년 재무 및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1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교육위원, 1942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1943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 및 총무,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뒤에도 1944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선전과장, 1945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 및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총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군자금 모금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차인재 지사는 2018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한편 남편인 임치호 지사 역시 1908년부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애족장을 추서 받은 부부 독립운동가다. 이 부부는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있는 로즈데일무덤에 잠들어 있다.
대담을 마치고 나오는 차인재 지사의 외손녀가 사는 헌팅턴비치의 주택가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대문 밖까지 나와 고국에서 찾아온 기자의 손을 놓지 않던 윤패트리셔의 따뜻한 마음을 뒤로 하고 LA코리아타운의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자는 "외할머니의 이 많은 사진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던 외손녀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말도 안 통하는 상태에서 기자가 두터운 앨범을 받아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가의 2세, 3세 집에 보관되어 있는 수많은 사진과 자료를 기증받아 보관 정리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니 그 이전에 인터넷 국가보훈처 누리집에 아직 차인재 지사에 대해 아무런 자료도 올라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손녀 집에 그렇게 많던 '사진 1장' 구해 올리지 않은 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국가보훈처는 대관절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 공개를 이런식으로 무성의하게 처리해도 좋은지 이 기회에 묻고 싶다. 만일 윤패트리셔가 이 사실을 안다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