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와 이완용의 벌거벗은 민낯

  • 등록 2025.08.18 13: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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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 사건편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제작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는 아주 긴 이야기다.

역사가 기본적으로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훨씬 역사가 재밌게 느껴질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편의 단편소설이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모여 빚어낸 대하소설이 역사라면, 그 흐름을 쭉 듣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이 책, 《벌거벗은 한국사- 사건편》은 복잡하게 뒤엉킨 인물들의 서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유명한 인기 역사 예능인 《벌거벗은 한국사》를 책으로 재구성하여 펴낸 것이다. 여러 방송분 가운데서도 한국사의 운명을 가른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편집했다.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의 숨겨진 면모를 벌거벗겨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한다는 기획 의도에 걸맞게, 이 책 또한 역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벌거벗은 무신정변’, ‘벌거벗은 여몽전쟁’, ‘벌거벗은 임진왜란’ 등 굵직한 역사 속 사건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속속들이 파헤친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완용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넘겼는지 낱낱이 파헤친 ‘벌거벗은 경술국치’ 편이다.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역사에 회자되어 왔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과정으로 나라를 팔게 되었는지 아는 이들은 드물다.

 

이완용은 사실 초고속 승진을 했던 유력한 인재였다. 한때는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엘리트 코스만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25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된 뒤로, 29살이 되던 1886년에 조선 처음으로 세워진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육영공원은 명문가 자제와 현직 관리들 가운데 30명 정도만 뽑았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이완용이었다. 육영공원에서 강조했던 영어 실력을 충실히 연마한 그는 첫 번째 기회를 잡는다. 바로 주미 조선공사관의 관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조선 공사관의 초대 주미공사는 박정양이었다. 그러나 부임 11개월 만에 청나라가 박정양이 자신들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한다는 명분으로 귀국을 종용했고, 힘이 없던 고종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초대 주미공사가 공석이 된 뒤로 이완용은 약 2년 동안 주미 임시 대리공사로 일했다.

 

그 당시의 이완용은 다만 출세에 관심이 많은 관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서 약소국의 외교관으로 당한 설움과 모욕은 강대국에 대한 비뚤어진 동경을 품게 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완용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p.210)

그 시절 서양인 대부분은 조선을 몰랐습니다. 조선은 알더라도 조선인은 문명화가 덜 된 미개한 국가에서 온 사람으로 취급했지요. 양반 출신임을 자부하던 이완용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낭인단체인 흑룡회 간사를 지냈던 쿠즈 요시히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더 큰 모욕도 들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이완용에게 한국인은 돼지만도 못한 열등 민족이라는 말을 했을 때 이완용은 이 말에 몹시 자극받아 세계 일등 민족이라는 미국을 연구, 시찰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완용은 고종에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 속에 34살의 이른 나이에 종2품까지 올라가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보통 과거를 통해 입직한 관리가 2품까지 오르는 데에 20~30년이 걸리는데, 이완용은 6년 만에 이루었으니 대단한 출세였다.

 

그에게는 출세를 위해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정세를 읽는 감각이 남달랐던 만큼, 만약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능한 외교관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비뚤어진 국가관이 결국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이게 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당시, 자신과 친분이 있던 미국공사관으로 재빨리 피신해 있던 이완용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해 공을 세우기로 했다. 30여 명의 행동대를 이끌고 궁으로 갔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절치부심한 끝에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그것이 아관파천이다.

 

러시아와 접점이 없었던 그가 아관파천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 공사관이 많은 정동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던 서구 외교관들의 친목 모임인 ‘정동구락부’에 소속되어 서구 열강 외교관들과 친분을 쌓은 덕분이었다. 아관파천의 성공으로 그는 오늘날의 외교부 장관에 해당하는 외무대신, 교육부 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 등 감투 세 개를 쓰면서 더욱 승승장구했다.

 

견고할 것만 같았던 고종과 이완용의 사이는 금광 채굴권을 둘러싸고 금이 가고 말았다. 러시아는 고종을 압박해 광산 채굴권을 차지하려 들었지만, 외부대신으로 미국과 금광 채굴권을 놓고 협상 중이었던 이완용은 고종의 명령을 거부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압박에 못 이겨 이완용을 지방 관찰사로 쫓아냈고, 그때부터 이완용의 비리가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의 이권을 나라 밖에 팔아넘긴 사실이 드러나고, 전북 관찰사로 부임해 세금 20만 냥을 횡령했다는 구설에 오르며 그의 평판은 바닥을 친다. 고종도 아예 이완용을 파직시키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권력을 가졌던 그는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호시탐탐 중앙 정계로 복귀할 기회를 엿보던 이완용은 러일전쟁으로 위기를 맞은 고종이 미국과 친한 그를 다시 찾으면서, 3년 7개월 만에 궁내부 특진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점차 일본의 영향력이 독보적으로 커지자, 그는 친일파로 완전히 노선을 바꿨다.

 

그때부터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과 초대 통감부 시기 일본이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친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선을 팔아넘기고 으뜸 권세를 누리는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며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p.234)

1910년 6월, 일본에서는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해 새로운 통감을 보냅니다.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칼에 맞은 상처가 완전히 낫기도 전에 통감부로 달려가 새 통감을 맞이합니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을 비밀리에 통감관저로 불러 한일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줍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은 조약 내용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줄임)…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한일강제병합조약 제1조의 내용입니다. 말 그대로 나라를 통째로 넘긴다는 의미이지요. 이 조약은 놀랍게도 이완용이 먼저 일본에 제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의 적극적인 병합 제안에 훗날 일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온 기분이었다.”

 

책에서는 이완용이 세 가지 매국을 했다고 일갈한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 정미7조약을 체결한 정미칠적, 그리고 나라를 완전히 팔아넘긴 경술국적. 이렇게 민족과 척을 진 그는 백작 작위와 오늘날의 30억에 해당하는 15만 원을 받고 호의호식했다.

 

 

1913년에 지은 이완용의 집은 무려 3,700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고, 1920년 초에는 거의 300만 원에 달하는 재산(오늘날의 600억)을 자랑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는 1926년 6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1,300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1926년은 이회영 가문 등 명망 높은 집안이 만주로 떠나 고달픈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조선이 수많은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지경이었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은 수많은 자국민의 인생을 적의 총칼 앞에 내던진 반역 행위였다.

 

비록 그는 당대에는 화려한 삶을 살다 갔지만,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친일파의 대명사로 죗값을 치르고 있다. 역사에는 그런 심판의 기능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유한하지만, 역사 속에 남는 기억과 기록은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 책, 《벌거벗은 한국사-사건 편》은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역사의 낯 뜨거운 면까지 낱낱이 보여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데에는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 – 광복 80돌을 맞은 올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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