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사방이 고요했다.
매미소리만 빼면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죄다 논밭으로 나가고 느티나무 숲을 가득 채우던 형아들의 웃음소리도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풀밭의 소도 더위에 지친 듯 다리를 펴고 앉아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나그네조차 없어 사공은 주막 마루에서 졸고 있고 나룻배도 더운지 강물에 드러누워 등을 식히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주전부리거리라곤 없었다.
강가로 나가 물억새 싹을 뽑아 씹어도 보고 말*을 건져 씹어 봤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
“아이스 께끼!”
형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느티나무 그늘에서 혼자 비석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총각이 나무통을 둘러매고 널브러진 시간을 깨우며 마을을 훑고 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에다 처음 듣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나는 까까머리 총각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 총각은 “배텃거리”를 돌고 “배기미” 마을을 거의 다 돌도록 그 신기한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했다.
“께끼”를 못 팔아 짜증이 났는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내가 귀찮았는지 “께끼”장수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스 께끼가 뭐하는 물건인지 잔뜩 궁금했던 나는 몸이 바짝 달았다. 여섯 살짜리 벌거숭이지만 돈이나 대신할 무엇이 있어야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곳간으로 달려가 보리쌀 단지를 열고 머리를 쑤셔 박았다. 버둥거리며 퍼 올린 몇 사발의 보리쌀을 보자기에 싸들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 “께끼”장수를 따라 잡은 건 “청룡안”고개 마루에서였다. 구멍 난 보자기엔 보리쌀이 절반도 안 남아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 총각은 보리쌀은 도로 가져가라며 인절미 같은 내 손에 아이스 께끼 두 개를 쥐어 주었다.
이미 녹아서 살점이 얼마 안 남은 “께끼”지만 조금 뒤면 등짝이 벌겋게 얻어맞게 될 줄도 모르고 꼬챙이 까지 빨고 또 빨며 마냥 행복했다.
(2)
희망촌!
희망이 가득한 마을로 들리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곳은 아니었다. 희망을 가져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선 단 하루의 나태도 허용되지 않았다. 날품팔이든 동냥이든 “밤의 꽃”이든 어떻게든 바퀴처럼 몸이 굴러 가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열 살짜리 코흘리개가 소문을 따라 찾아간 곳이 그 “희망촌”이었다. 엄마는 그 판자촌에 쪽방을 하나 얻어놓고 원주역에 나가 행상으로 절망을 이어가고 있었다. 종적을 감춘 남편을 찾겠다며 외동아들을 작은집에 맡겨 놓고 나선 발길이 그만 원주에서 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엄마와 같이 원주역에서 행상을 하며 희망을 만들어갔다. 그 때 나는 원주역 대합실에서 “초콜릿”이란 물건을 처음 보았다. 두 양복쟁이 신사가 개찰 줄에 서서 입에 침을 튀겨가며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하도 얄밉게 먹기에 장사도 잊은 채 한 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중에 돈 벌면 저거 마음껏 사먹어야지” 다짐을 하면서.
(3)
처음으로 공책을 탔다.
여섯이 뛰면 늘 4등이나 5등이었다. 보물찾기와 뜀뛰기는 나하곤 인연이 멀었다. 그날도 앞서 달리던 아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3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겸연쩍긴 하여도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 기쁨도 이내 쓸쓸함으로 바뀌었다. 누구에게 자랑할 데도,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이도 없었다. 나는 또 다시 작은 집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엄마는 학교라도 가야 한다며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돈식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상을 타 기분이 좋다며 국밥집으로 데려가 국밥을 사 먹였다. 가을 운동회는 그야말로 온 면민들의 잔치여서 운동장 가장자리는 잡상인들로 북적였다. 장터의 국밥집들도 학교로 옮겨와 가마솥을 걸고 국밥을 끓여댔다. 학교에선 기부를 한 학부모에게 국밥식권으로 답례를 했다. 나에겐 기부금을 낼 부모도 용돈을 줄 사람도 없었다. 끝내는 그 국밥을 먹어보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4)
벌써 한 해가 가는군.
우리가 벗으로 보낸 햇수도 달걀 서너 줄은 채웠겠지?
푸르름이 숲을 이루던 시절에 만나서 어느덧 그 숲에 눈발이 날리고 있다네. 자네와 난 참 많은 걸 나누었지. 그 많은 날을 함께 하면서 자네는 늘 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지. 하다못해 먹는 것과 노는 것조차 내 취향에 맞추어 주었지. 그런 자네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는지.
벗이여!
우리 허리우드 밑 그 국밥집에서 만나 회포를 푸세나.
언제나 그랬듯이 하드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하고 당구를 한 게임을 하고 수운회관 벤치에 앉아 초콜릿을 녹이며 옛 기억 속에 빠져 보세나. 늘 그랬던 것처럼.
국밥집에서(희망가)
노래를 부른다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치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희망가를 부른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머무는
나를 본다.
그렇다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국민 소리 꾼”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광천중, 선린상고, 명지대를 나왔다. 음악을 좋아하여 고교 졸업 직후부터 태평소를 비롯한 피리 종류의 악기는 거의 다 섭렵했다. 그 뒤 김덕수 사물놀이패, 이광수 사물놀이패와 어울리며 공연활동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음반 데뷔는 1995년에야 이루어지는데, 그의 나이 마흔 여섯 때 일이다.
<국밥집에서는> 그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최산 시인의 시가 노랫말이며 장사익이 손수 곡을 붙였다. 피아노의 겹소리로 시작 되는 첫 부분부터 예사롭지 않음이 전해진다. 임동창의 피아노에선 얼핏 광기(狂氣)가 느껴지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쌈빡한 꿈처럼 간결하다.
기타의 김광석(가수 김광석과는 다른 이)과 타악기의 김규형도 그 판에선 “한 가락”하는 인물들이어서 곡의 맛을 더해주며, 어릴 적 웅변으로 다져진 장사익의 목소리는 겨울 밤 하늘의 별처럼 옹골차다.
재즈. 국악, 가요의 매력요소를 한 타래에 잘 엮은 곡이다.
* 말 : 식용 수생식물. 말풀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