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새해 맞아 8천 만이 손 맞잡기를

2018.12.31 11:44:53

이상룡 선생 발자취를 찾아 떠나다

[우리문화신문=고명주 작가]  2019 기해년은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100돌이 되는 해다. 그 뜻깊은 해를 기리기 위해 범국가적 시민적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소중한 해를 코 앞에 둔 무술년( 2018년) 끝자리에서 순국선열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역사 기행에서 보고 느낀 사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3.1운동 100돌을 맞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대자연으로 대표되는 들꽃 한 송이 들고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는 작업을 해왔다. 특히, 광복절이 되면 뜻깊은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해왔다. 2015년 광복 70돌에는 서울 서대문 독립관에서 <순국선열추모문화전>, 이듬해인 2016년에는 길림성 길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의열단의 흔적을 찾으며 <태극기 전시회>를 통해 태극기의 소중함도 느껴보았다. ​

 

광복 72돌을 맞이한 2017년에는 배낭 하나 둘러메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떠났다. 2017년 8월 11일 늦은 밤, 인천에서 대련으로 출발하여 12일 오전에 그 옛날 수많은 독립군이 타고 갔을 만주벌판을 가로 지르는 기차를 타고 길림성 길림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과 논들, 그 너머 하얀 구름이 반겨주었다.

 

비행기로 장춘에서 길림에 곧바로 갈 수 있지만 필자는 늘 대련으로 간 다음 대련역에서 중국의 고속열차인 까오티에나를 타고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간다. 이 길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이토오 히로부미)을 처단하러 떠났고 조국의 독립을 찾고자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떠나갔다. 그런 한민족의 역사가 칸칸마다 실려 있는 이 구슬픈 역사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배낭 메고 ​중국여행을 해 보신 분이면 알 것이다. 중국기차표를 사고 검색당하고, 기다리고, 표 한 장 사는 것도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고객서비스 측면에서는 가야할 길이 멀다. 그 현지의 규정을 따르라면 따라야 하지만 중국인 전체가 차표 사는데 쓰는 시간을 쓰는 방식을 바꾼다면 국민에게는 큰 선물일 텐데...... 요사이는 전자자동시스템이 도입되어 많이 편해진 측면도 있지만 나 같은 외국인과 대다수 중국인민은 아직도 많은 시간 소요되어 불편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여행을 하는 동안 중국 현지인의 도움이 없다면 그 여정은 참 많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이번에도 대련시 뤼순에 있는 뤼순감옥을 가려다 우연하게 대련역에서 만난 중국친구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중국 도처에서 만난 수많은 중국 친구들이 있어 늘 힘이 되었다. 그 인연을 기록한다면 오롯이 책 한 권이 나올 것 같다.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잡지 않는다.'는 것이 인생의 좌우명처럼 생각하며 인간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

 

여행가이드를 하는 길림이 집인 친구는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가 순국한 길림시 서란이 고향이다. 길림에서 다시 버스타고 2시간 여 달린 뒤 도착한 수란시 지수현. 이곳에서 1박을 하며 이 깊은 농촌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며 투쟁했던 순국선열의 고난을 느끼고 생각해 보니 가슴이 짠하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중국인들이 사는 민가와 농촌을 둘러보고 피어있는 들꽃을 사진에 담았다. 강아지풀, 백일홍 등 우리 고향에 피어있는 들꽃들이 집 담장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이나 이곳이나 피는 꽃이 다를 것이 없다. 아침에 풀벌레 노래하고 멍멍이 반갑다 뛰어오고 닭장의 닭들은 하얀 달걀 낳았다고 울어대고 시장엔 사람냄새 가득하다.

 

 

 

 

 

 

이곳 시장도 곳곳에서 가져온 다양하고 엄청난 물건으로 활기가 넘친다. 참 사람냄새 풍기는 시골장, 그 옛날 우리의 5일장도 이랬다. 장날이면 엄마가 사올 하얀 찐빵을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이 푸근했는지 모른다. 소금에 푹 절인 고등어까지 사오시면 그날 우리집은 고등어 타는 연기가 구들장을 타고 방까지 들어와도 마냥 좋았다.

 

내가 중국아침으로 참 좋아하는 중국 전통음식 류티아오와 또우장, 값도 10원(한국돈 1,600원)만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한 끼 하시러 나온 인상 좋은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며 음식도 나누어 맛있게 먹고 아침시장의 풍성함과 사람 사는 냄새를 가슴에 담고 담았다.

 

이제 안동 임청각의 주인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신 석주 이상룡 선생이 순국하신 소과촌 마을로 들어갔다. 사실, 이곳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이상룡 선생의 증손 이항증 선생과 통화하여 장소를 알 아내서 가능했다.  중국친구는 그 주소를 받고 바쁜 중에도 그 곳을 사전 답사하여 안내해주는 그런 진정어린 도움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중국의 농촌을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현지에서 도움을 주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정확한 정보 없이 가면 아주 낭패를 보기 쉬운 곳이 현재의 중국 사정이기 때문이다.

 

요사이는 정확한 주소만 있으면 바이두 지도를 이용하여 검색해보고 현지 운전수와 정보도 주고받으며 찾아갈 수 있다. 생각보다 중국의 정보통신(IT) 활용수준이 매우 높다. 시장에서도 손말틀(휴대폰)을 이용하여 결재도 하고 QR코드의 활용이 아주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것을 중국의 시골에서도 접한다.​

 

 드디어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입구에 마을 어르신들이 담소를 하고 계셨다. 이 마을에 이상룡 선생이 살았었는가 물으니 머뭇머뭇 하시다 그렇다고 말씀하시며 가끔 한국인들이 그분을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대답한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1932년 순국 이후 주검이 묻힌 무덤 자리를 찾아갔다. 뒷동산에 심어놓은 옥수수 밭길을 걸어걸어 올라갔다. 그 어르신들의 안내가 없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그곳에는 아무 표지석도 없이 그냥 흔적만 남아 있었고 사시사철 말없이 풀들과 들꽃이 지켜주고 있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1858.11.24 ~ 1932.6.15) 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6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셨던 분이다. 그런 분의 무덤 자리를 이렇게 아무 표지석도 없이 방치해 놓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그런 상황이 바로 순국선열, 애국열사를 대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이상룡 선생은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간도(間島)로 망명하여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며 길림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ㆍ이시영 등과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어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는 등 순국할 때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2017년 8.15일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복원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순국선열, 애국지사가 제대로 대접받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하고 올바른 이야기다. 하지만 수많은 순국선열의 유적지를 다녀 본 입장에서 이 부분에 수많은 노력과 자금, 국가간의 긴밀한 협조가 절실하다고 느낀 게 사실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유적지가 중국 현대화의 물결에 하나 둘 지워지고 있는 현장을 보고 보아왔기에 이 일의 시급성을 더 말할 나위 없다.

 

생가도 복원해야 하지만 지금 곳곳에서 이름도 없이 묻힌 독립투사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정말 중요하다. 거창하고 보여주는 일이 아닌 곧 최소한 표적이라도 세워주는 일, 한반도와 그 너머에 무명으로 죽어간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표시라도 남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을의 어르신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준비한 기념선물도 드렸다. 함께한 중국분들과 이곳에 기념관을 만든다면 양국을 위해서도 참 좋은 일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담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

 

아쉬운 발길이었지만 이역만리에서 순국하신 애국지사 유적지를 보고 기록도 남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느끼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듯 했다.​

 

다음 여정인 연길로 떠나는 기차 차장 밖 깊은 어둠이 우리 한반도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순국선열들이 다시 일어나 분단된 현재의 이 현실을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할까? 이런 나라를 만들려고 풍찬노숙을 하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들꽃으로 스러져 가진 않았을 것임이 분명한데 말이다. ​이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한반도, 통일의 한반도는 언제쯤 도래할까?

 

물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니 한반도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남북정상이 역사적인 회담을 3차례나 열었다. 북미담화 상가포르에서 열렸다. GP가 시범적으로 폭파되고 휴전선에는 지뢰제거로 평화의 땅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남북철도연결착공식도 열리고 제주의 감귤도 북녘에 보내고 곳곳에서 평화 교류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하나 둘 준비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더 깊숙이 들어다 보면 북핵문제의 본질은 큰 변화가 없다. 남북문제는 힘의 논리, 더 나아가 국제적 문제로 인식되고 그 논리대로 가다보니 진정한 돌파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민족의 숙명의 염원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평화의 노력이 한 번에 쓰러질 수 있는 상상누각을 쌓고 있는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

 

지금의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서 목숨을 던지며 순국선열이 찾고자 했던 자유와 행복, 만들고자 했던 완전 독립된 나라, 지키고자 했던 내 강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제2의 독립운동을 한다는 각오아래 힘찬 결기가 필요하다. 슬기로움으로 민족명운을 풀어가는 2019년이 되길 소망해 본다. ​

 

100년 전 1919년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3천 만이 두 손으로 태극기를 들었었다. 이제 2019년은 평화와 새 광복 그리고 치유를 위해 8천 만이 두 손을 불끈 잡고 나가야 만이 순국선열이 만들고자 했던 진정한 새 광복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명주 작가 kohmj6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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