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제102돌」 맞아 275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

2021.02.27 18:32:19

홍범도 장군 아들 홍양순 선생 등 건국훈장 136명, 건국포장 24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3‧1절 제102돌을 맞아 1920년 독립전쟁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아들로 함경남도 정평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순국한 홍양순 선생 등 275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36명(애국장 28, 애족장 108), 건국포장 24명, 대통령표창 115명으로, 포상자 가운데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33명이다.

 

건국훈장ㆍ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102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400명, 건국포장 1,392명, 대통령표창 3,893명 등 모두 16,685명(여성 526명)에 이른다.

 

국가보훈처는 앞으로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유관기관과 독립운동 사료수집 협업 체계를 공고히 하고, 나라 안팎 소장 자료를 지속해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ㆍ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다양한 유형의 독립운동 사례를 발굴하는 데 더욱 노력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3‧1절 제102돌을 맞아 포상되는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함남 정평군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순국한 홍양순 선생

 

 

1907년 11월 이후 함남 북청군 등지에서 부친 홍범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1908년 6월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순국하신 홍양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봉오동ㆍ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아들로 1892년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 단양이씨(丹陽李氏)도 1908년 3월 함남 북청에서 남편 홍범도의 의병활동 관련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순국한 공적으로 이번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다. 홍범도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907년 11월 함남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산포수와 청년 2백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선생도 부친이 이끄는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 북청수비대와 토벌대를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이루었고 1908년 1월 일본군 갑산수비대와 우체국을 연이어 공격하며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소규모 부대 단위로 전환하여 유격전술을 펼쳤다. 선생은 이에 따라 소규모 부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유격전을 치르다 1908년 6월 16일 함남 정평군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순국하였다.

 

한편 단양이씨는 1908년 3월 함남 북청에서 남편 홍범도의 의병활동 때문에 체포되었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키며 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였다.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는 중국 간도로 이동하여 1919년 5월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지속해서 수행했다. 1920년 5월에는 국민회군 등과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 총칼에 맞서 온몸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한 박도철 선생

 

 

일본 헌병의 총칼에 맞서 온몸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한 박도철(朴道哲)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3일 충북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4월 2일 이상직(李相稷)의 주도 아래 주민 300여 명이 합세해 만세시위를 일으킨 데 이어 일어난 광혜원 장날 만세시위는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규모 시위군중에 놀란 광혜원 헌병분견소장은 진천헌병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과 광혜원 시위현장에 증파된 일본 헌병들이 비무장 시위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을 가해 9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만세운동 참가자에 대한 일본 헌병의 폭력적 무력 진압을 통해 ‘무단통치’의 실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 제주도에서 경찰관주재소 등을 공격한 무장투쟁가 김용충 선생

 

 

 

제주도에서 일본인의 축출을 모색하고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 옥고를 치른 김용충(金用忠)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좌면 하원리에서 일본인 축출을 시도하고 총독부 관공서를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날 제주도 좌면 소재 법정사를 중심으로 불교인ㆍ선도교인ㆍ지역 주민 등 400여 명이 큰 깃발을 휘날리며 화승총과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중문리 경찰관주재소 등 총독부 관공서를 공격하다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실형을 받은 분은 30여 명이었다.

 

선생은 1919년 2월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가 1923년 2월 13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8년 9월 19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법정사 스님 김연일(金蓮日)은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탄했을 뿐만 아니라 병합 후에는 관리는 물론 상인들까지도 우리 동포를 학대했다. … 먼저 제주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을 섬 밖으로 쫓아내야 할 것이다.”라고 연설을 하였고, 이어 10월 5일 선봉ㆍ중군ㆍ후군대장 등을 임명하였다. 선생은 제주도에서 이러한 조직적 무장투쟁에 참가해 선도적 역할을 했다.

 

❖ 서울로 확산된 제2차 광주학생운동에 앞장선 임복희 선생

 

 

서울 정신여학교 재학 중 제2차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만세시위와 동맹휴교에 앞장선 임복희(林福姬, 女)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정신여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930년 1월 15일 서울에서 일어난 제2차 광주학생운동 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무기정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1월 13일 기숙사에서 학우들과 등사한 격문에는 학생운동의 원인이 “민족차별을 철폐할 것, 이번 학생사건에서 퇴학당한 학생을 복교시킬 것, 제국주의 배척, 경찰관이 학교에 무단출입하는 것을 금할 것” 등 민족차별 교육정책 때문이었고 그 궁극적 해결은 민족독립임을 표방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250개 학교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함으로써 또 하나의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선생이 참여한 제2차 광주학생운동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미주에서 평생을 민족독립과 남녀평등을 위해 불을 지핀 김노디 선생

 

 

 

미국에서 민족독립과 남녀평등을 목표로 활동한 김노디(金노디, 女)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재미한인대표자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협조하여 일하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는 일을 돕고자” 한다며 민족독립과 남녀평등의 동시적 해결을 주장했다. 이후 대한부인구제회 중앙부장, 범태평양부인대회 한국대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특히 미주지역을 순회하며 한국의 사정과 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는 연설을 하여 한인구제사업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 대한적십자사 간호부로 독립운동가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채계복 선생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애국부인회 서기와 독립부인회원, 대한적십자사 간호부 등으로 활동한 채계복(蔡啓福, 女)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4일 서울 소재 여학교 대표회의에서 정신여학교 대표로 참가해 3월 5일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였고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선언기념회 부원과 애국부인회 서기, 중국 연길현에서 대한적십자사 간호부와 독립부인회원, 1927년 함남 원산에서 원산여자청년동맹 교양집행위원, 1930년 근우회 원산지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선생은 1920년 1월 철혈광복단원들이 주도한 회령 지점 조선은행에서 용정으로 운반 중인 현금 15만 원을 빼앗아 무기구입을 추진하다 부상당한 최계립(崔溪立) 선생을 치료하고 의연금을 모집했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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