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존중ㆍ절제ㆍ애국을 실천했던 경주 최부잣집

2021.03.29 12:24:5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영호 지음, 사닥다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교사회였던 조선 500년 동안 한반도 곳곳에는 많은 가문이 생겼고, 이들 가운데는 명문가로 꼽히며, 승승장구한 곳들이 꽤 많다. 그러나 이 명문가라고 하는 곳들에는 그저 고래등 같은 기와집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철학이 전해지지 않는 곳이 흔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곳간이 차면 자연스레 베푸는 마음이 생겨날 법도 하건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아무리 곳간이 그득해도 갈증이 나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싶고 그 많은 재산을 꽁꽁 움켜쥐고 사는 것이 일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무려 300년 동안이나 깨끗한 재물, 적정한 재물을 유지해 칭송받는 가문이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씨 가암파 가문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을 때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쓸 수 있을 때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은 부단한 자기수양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이 책,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최부자 가문에서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해냈는지, 그 저변에 흐르는 정신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경주 최씨 가암파 가문은 최진립을 파시조로 하여 12세손인 최준까지 12대에 걸쳐 약 300년 동안 지속됐다. 가문의 파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국난(國亂)에서 두 번 모두 병사를 일으켜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몇 안 되는 애국지사 중 한 명이었다.

 

최진립은 높은 벼슬을 했으나 청백리로 재물을 탐하지 않아 특별히 부유한 것은 아니었다. 최씨 가문이 ‘부잣집’이 된 시기는 3세손 최국선 이후부터다. 그는 수천 년 내려온 직파농법 대신 벼 수확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이앙법을 도입하면서 최씨 가문을 ‘부잣집’ 반열에 올려놓았고, 4세손인 최의기 대에 와서는 1만 석 고지를 달성해 만석꾼 대열에 들어섰다.

 

사실, 최부잣집이 처음부터 널리 베푸는 선행을 했던 것은 아니다. 최국선도 처음에는 소작농에게 7할 정도의 높은 소작료를 받으면서 여느 지주처럼 재산을 모았다. 그 당시에는 높은 소작료가 특별히 가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화적이 쳐들어오면서 가문 운영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화적에게 토지문서를 빼앗긴 최국선은 밤새 숙고와 회의를 거듭하며, 지나친 부를 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한반도에서 최초로 소작료를 상당히 저렴한 수준으로 낮추면서 ‘상생’의 기치를 올렸다. ‘상생’은 권위에 의한 억압과 수탈이 일반화되어있던 시기, 그 자체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 진부하기까지 한 ‘상생’과 ‘인간존중’이지만, 당시에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부자가 삼 대를 가기 어렵다는 일반의 통념을 깨고, 무려 12대나 만석 재산을 유지한 비결은 가문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세 가지 정신 덕분이었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을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인간존중 정신이다. 파시조 최진립부터 12세손 최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노비들을 포함해 모든 인간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긍휼한 마음으로 대했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자 재산으로 인식되던 시절, 이들은 노비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고 가족처럼 아꼈다.

 

최진립이 병자호란 험천 전투 때 결사 항전하다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두 노복에게 말했다.

 

“나는 마땅히 이 전장에서 죽을 것인즉, 너희 중 나를 따를 자는 모름지기 이 옷을 입어라.”

그러면서 옷을 벗어 던지자 기별이란 노복이 울면서,

“상전께서 충신이 되는데 종은 왜 충노가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며 마침내 최진립과 함께 죽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다른 노복 옥동도 함께 죽었다. (p.56)

 

그 이후 최부자 가문에서는 함께 죽음을 택한 종복 옥동과 기별의 제사를 오늘날까지 지내고 있다. 지난 2000년에는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두 사람을 위한 불망비(不忘碑)까지 세워 그 정신을 기렸다.

 

 

이처럼 노비까지 아우르는 최부자 가문의 인간존중정신은 최진립의 8세손 가운데 한 명인 수은 최제우까지 이어졌다. 동학, 곧 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집안의 여종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았다. 반상의 구분의 희미해져 가는 시대라고 해도, 노비를 진정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학의 창시자 수은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경주 최부자 가문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재벌가에서 혁명가가 나온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부잣집이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면서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혁신 DNA’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최부잣집은 1920년대 소작쟁의에서 소작인들의 요구사항으로 등장한 소작료 5할을 몇백 년 앞서 도입했고, 신분제가 폐지되기 한참 전부터 노비의 영전에 절을 할 만큼 평등사상을 앞서 실천했다.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신은 바로 최부잣집의 오랜 인간존중 정신을 세 글자로 담아낸 것이다.

 

두 번째는 재물그릇의 크기를 정해두고, 그 그릇이 넘치게 재물이 쌓이면 아낌없이 나누는 절제정신이었다. 만 석을 넘어 2만 석을 할 수 있는데, 지나친 재물을 경계하여 만 석에 그치는 것은 어쩌면 2만 석을 일궈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그걸 해냈다. 모두 가훈을 뼛속 깊이 새기면서 자기수양에 부단히 힘쓴 덕분이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라는 유명한 말은 현종 13년 신해년(1671), 삼남 지방에 대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최국선이 주변 백 리의 백성을 구휼하면서 생겨났다.

 

 

“모든 사람이 장차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곳간을 열어서 모든 굶는 자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라.” 그리하여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국선의 명에 따르기 위해 주위 사람들과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방 백 리란 경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감포, 북으로는 포항, 서북으로는 영천, 남으로는 밀양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지역이었다. (p.95)

 

이렇듯 최부자 집안은 항상 과욕을 경계했다. 부(富)와 귀(貴)를 동시에 탐하는 것을 경계하여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고, 흉년에 헐값으로 나오는 땅을 사들이지 않았으며, 남는 재물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거나 어려운 이를 구휼하는 데 썼다. 특히,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자칫 당쟁에 휘말려 가산을 몰수당할 것을 염려한 것도 있겠으나, 부를 가진 자가 권세까지 탐하는 것은 과욕이라 여겨 절제한 바가 컸을 것이다. 또한 벼슬을 하다보면 제 뜻과 관계없이 그 지위에 있어서 누군가를 해치게 되는 일도 발생하므로, 이는 인간존중 정신과 맞지 않다고 여겨 그리한 바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자신이 가진 최선의 수단으로 위기극복에 이바지하는 애국정신이었다. 파시조 최진립 대부터 보여줬던 위국헌신의 면모는 12세손 최준까지 이어졌다. 최준은 일제강점기, 비록 이회영 일가처럼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나진 못했지만, 백산상회를 통해 막대한 양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이렇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만석 재산의 절반을 쓰고, 절반 남아 있던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를 설립했다. 이 대구대은 훗날 청구대와 합병되어 오늘날의 영남대가 되었다. 지금 최준의 손자 최염은 만석 재산은 한때의 영화로만 남긴 채, 경기도 어느 지역의 작은 아파트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인간존중, 절제, 그리고 애국. 이 세 가지 정신은 300년 동안 최부자 가문을 지탱한 핵심 DNA였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최부잣집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처신했다. 심지어 최진립의 9세손 최세린은 스스로 자신의 아호를 ‘대우(大愚)’, 곧 ‘큰 바보’로 지었으며, 11세손 최현식은 아호를 ‘둔차(鈍次)’ 곧 ‘일등 다음 자리에 머문다’는 뜻으로 지을 정도였다.

 

 

 

대우는 자신을 어리석은 이로 낮추어 모든 사람을 우러러보고자 한 뜻이었으며, 둔차는 무리하게 일등을 하는 것을 경계하여 사람들의 질투나 시기를 피하고, 부를 이룸에 있어서도 일등을 욕심내지 말고 항상 모자란 듯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지혜가 담긴 아호였다.

 

최부잣집의 이러한 정신과 지혜는 모두 가문 대대로 이어진 육연(六然)과 육훈(六訓), 그리고 가거십훈(家居十訓)에 집약되어 있다. 육연과 가거십훈은 수신의 도(道), 육훈은 제가의 도(道)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세상 사람들 모두 이처럼 수신하고 제가하여 진정한 치국, 그리고 세상을 밝히는 평천하를 이루길 기대해본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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