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공묘(孔廟)ㆍ공림(孔林)ㆍ공부(孔府) : 곡부 성안에 있는 공묘를 찾았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孔子, B.C. 551~479)는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다. 공자의 ‘자(子)’는 '선생님'을 뜻하는 존칭이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했으나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년에 고향인 노(魯)나라로 돌아와 후학 양성하였다.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를 거치며 유가(儒家)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동아시아 전역의 정치ㆍ사회ㆍ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공묘의 중심인 대성전(大成殿)은 궁전처럼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곳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자 유교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다. 오늘날에도 유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교육하는 장소다.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여러 나라에도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올리는데, 공자와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유교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가족 묘역으로 터가 매우 커 좁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전동차로 이동하며 관람했다. 이곳에는 약 10만 기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공씨 가문의 것이다. 죄를 지은 자는 이곳에 묻힐 수 없다는 엄격한 가풍이 내려오며, 외국에 사는 후손이라도 이곳에 안치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공 씨 후손들도 이곳을 찾아 제를 올린다고 하며, 배우 공유(77대손)와 공효진(78대손)이 공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공자가 노자에게 인간 세상에서 불평등을 물어보니 “산봉우리가 있으면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다. 자연도 이랬는데, 어찌 똑같겠느냐, 그래서 불평등은 자연 현상이다.”라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동양의 으뜸 철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유교는 무악 중용, 도교는 인간이 자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서 자연 그대로 살아가자는 무악의 동기로 한다. 한편으로 공자의 학문을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권력자나 많이 가진 자를 위한 학문으로 서민 백성보다는 양반 권력자의 처세술 학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공자묘에서 소리꾼 엄수정 여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하니 사철가를 불렀는데, 재청 요청으로 충효가를 불러서 감동적이었다.
▲ 공부(孔府) : 공자의 직계 후손(종손)들이 대대로 살던 마을.
▲ 궐리(闕里) :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이름으로, 유교의 발상지를 상징.
▲ 행단(杏壇) : '행(杏)'은 살구나무를 뜻하며,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 단을 높이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소호릉(少昊陵)과 경령궁유지(景靈宮遺址) : 황제 헌원의 아들로 오제(五帝) 가운데 한 명인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 무덤을 찾았다. 무덤으로 오르는 소로가 나 있어 올라가 보았다. 소호릉 바로 앞에 배총(왕릉이나 귀인의 무덤 주변에 주인공을 모시듯 곁에 세워진 작은 무덤)이 있는데, 밑변 28.5m, 높이 8.7m로 비석에는 수구(壽丘)라고 적혀있다. 황제 헌원(軒轅)이 태어난 곳으로 석조 돌무지무덤 형태로 만들어진 무덤으로 '만석산(萬石山)'이라 불린다.
소호는 청양 씨, 금천 씨, 궁상 씨(窮桑氏), 운양 씨(雲陽氏), 주선(朱宣)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궁상에서 태어나 동이족의 수령이었다고 한다. 오행의 으뜸인 ‘금(金)’의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금천씨라 일컬어지며, 84년 동안 재위하며 법도와 관직명을 정비하는 등 고대 문명의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특히 한국과 중국 김 씨들의 조상으로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시조로 언급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장군의 묘비에 가야 김씨가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전해져 흥미로웠다.
소호릉과 경령궁 유적지 서쪽 80m 지점에서 돌도끼, 토기 등이 신석기 시대 문구문화(大汶口, 6,300년~4,600년)와 용산문화(龍山, 4,600년~4,000년)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다. 소호릉은 일반적인 관광 코스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대형 버스 진입조차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 결국 마을 이장(촌장)과 통화하고, 주민들에게 몇 차례나 길을 물으며 마을을 몇 바퀴나 돌고 나서야 비로소 유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소호릉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와 맞닿은 소중한 역사를 마주하여 귀중한 시간이었다.
▶치우릉(蚩尤陵) 답사는 일정 조정으로 빼기로 하였다.
▶무씨 사당(武氏祠) : 제녕(济宁)시에 있는 무씨 묘역에서 발굴된 화상석(돌에 새긴 그림) 자료는 중국 고대사를 증명하는데, 이론적 바탕이 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물 같은 유적이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유적은 이곳 무덤 군에 새겨진 석각 그림이다. 무씨는 은나라(殷, 동이족 국가) 임금 무정(武丁)의 후예로 추정되며, 동한 시대(147년)에 건립되었다는 명문 90여 자가 남아있는 한나라 화상석(汉 画像石) 유적이다. 석각 벽화에는 중국 고대 신화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좋다.
전시실에는 한 쌍의 석궐(좌우 한쌍으로 돌을 쌓아 만든 장식적인 문)과 석사자, 두 개의 비석, 화상석 12점과 후석실 화상석 2점, 16개 등 40여 개의 화상석 조각이 있다. 이곳은 무씨 가문이 제사를 지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사당 내부 벽화로 묘 석실의 벽면 전체에 그림(화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모아 두었다. 그림에는 서왕모, 동왕공 같은 신화 속 이야기와 공자(孔子)와 노자(老子)를 만나는 모습과 공자의 제자들, 그리고 사당 주인이 수레를 타고 외출하는 모습, 연회와 가무를 즐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또, 문왕(文王)의 열 아들, 조선자ㆍ형가ㆍ형거 등 옛 성현의 모습과 상나라 고대 제왕들 이야기가 그려져 있고, 인상여ㆍ전제ㆍ형가ㆍ충신 의사와 민자건ㆍ노래자ㆍ정란ㆍ양고행 같은 효자와 현부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 자료가 어두운 묘실에 남아있어, 고대 성현의 모습과 신화를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다.
화상석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 유리 전시관 너머로 보아서 아쉬웠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돌판에 조각되어 있고, 그림이 선명하여 이해하기 쉬웠다. 각 장마다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데, 우리는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 단군 신화 관련 : 일부 학자들이 곰과 호랑이 도상을 근거로 단군 신화의 흔적을 주장하여 유심히 살폈으나, 짧은 시간 내에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 복희 여화도(伏羲女媧圖) : 중국 고대 신화에서 인류를 창조한 남자신과 여자신이자 남매 혹은 부부로 묘사된다. 반인반수(半人半獸)로 상체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하체는 뱀(또는 용)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중국의 여러 자료에서 신화에 대한 그림을 보아서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했는데, 이곳 석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수륙공전도(水陸攻戰圖) : 대규모의 수륙전투도가 새겨져 있다. 아치형 다리가 있고, 그 위에서 병사들이 서로 뒤엉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배를 타고 수군(水軍)이 교전하는 모습과 말을 탄 기마병들이 돌격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새겨 놓아 당시 전투 상황을 생생히 모사해 놓았다. 그림에는 관중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전문가의 설명 없이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 무기 나 복식이 춘추전국시대(관중)와 한나라 시대의 것이 혼재되었다고 하며, 시대적인 오류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 상단 : 봉황 두 마리, 전각에 사람들이 모여 연회를 즐기고, 예를 갖추어 대화하는 모습.
○ 중단 : 활 쏘는 사람, 상서로운 나무와 말, 그리고 예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
○ 하단 : 화려한 마차와 수레 행렬이 무덤 주인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한다.
화상석 자료를 보면서 설렘과 부러운 마음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늘 묵는 호텔은 담배 냄새가 찌들어 환기했는데도 아침까지 담배 냄새에 목이 더 잠긴다. 중국 특유의 실내 흡연 문화는 적응하기 힘이 든다.
(상구시, 297km 3시간 이동, 호텔 : 金士顿国际酒店 0370-266 9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