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인간 ‘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하다

2021.04.07 10:57:04

세상을 뜬지 꼭 90주년이 되는 날,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9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주 금요일은 4월 2일, 이날 망우리 한 묘역에 정장차림의 시민 50여 명이 모여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라는 한 일본인이 세상을 뜬지 꼭 90주년이 되는 날, 그를 알고 사랑하고 기념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의 묘역을 찾은 것이다. 겨우 40년을 살다가 이 땅에서 간 이 사람은, 굳이 일본인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얽어매어 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의 삶을 추적해 보고 그 삶의 의미를 되살려보고 있기에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1891년생인 다쿠미는 먼저 와 있던 형 노리다카의 권유로 1914년에 한반도로 건너와 형과 친구인 야나기 무네요시 등과 함께 도자기나 소반 같은 한국의 공예를 연구하고 일본 치하에서 사라질 운명에 있는 이들 예술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조선민족작물관을 만드는 등 무진 애를 썼으며, 임업에도 정통해서 우리나라 전역의 녹화사업에 공헌했으나 과로로 인해 1931년 4월 2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짧은 문장으로 그를 다 알릴 수는 없지만 1920년대 이 땅에 와서 살면서 땅과 사람들을 사랑했고 이 땅의 헐벗은 산야에 심을 나무를 가꾸었고 미처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우리들 삶 속에서의 아름다운 감각과 생각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사랑해서 그것의 값어치를 정리해 드러내 보였다. 이 사람에게 한국, 당시의 조선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열등한 인종이 사는 땅이 아니라 친구들이 살아가는 땅이기에, 그들의 삶 자체 하나하나의 값어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사랑하고 키워주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참 인간이었다.

 

 

“나는 종종 노련한 장인들의 작업장을 방문하여 그 숙달된 손놀림에 이끌려 자리를 뜰 수 없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기구나 복잡한 설계 없이도 작업이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자신 있게 움직였다. 그 긴 담뱃대를 물고 허연 콧수염 사이로 가끔 생각이나 난 듯이 연기를 뿜어내면서 무념무상으로 작업을 했다. 그곳의 작업 모습은 조금도 무리한 부분이 없는 듯이 보였고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당시 한창 청년이었던 다쿠미는 서울 근처나 먼 시골에 있는 소반 공장을 방문했던 모양이다. 초가집 바닥을 조금 넓게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깎고 다듬고 말리고 하는 과정이 곳곳에 펼쳐져 있을 것이고 거기에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앉아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거기에서 평생 싫증 내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평안한 모습이고 그 마음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물건에 담겨 있음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소반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작업의 기쁨을 찾아낸다. 그것은 이 광경을 보고 글을 쓰는 필자의 마음에 이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눈으로 보니 모든 정경이 사랑스럽고 의미 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다쿠미는 절친한 친구이자 선배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저는 처음 조선에 왔을 무렵, 조선에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에 돌아갈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들에게 아직 깊이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던 무렵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고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해 준 것은 역시 조선의 예술이었습니다.”

 

 

망우리 공원을 올라가서 한 바퀴 도는 길을 따라 곳곳에 진달래가 한창 피고 산벚꽃이 분홍빛 꽃물들을 들이고 있는 가운데 동남쪽, 아마도 연장을 해서 보면 그의 조국이라 할 일본이 보이는 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날 무덤 주위에는 정말 많은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90주년이란 시점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는지, 추도식에 온 분들도 다양했다. 그동안 우리 측에서는 다쿠미를 기리는 사람들이 주로 왔는데 이날에는 일본대사관 광보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주쵸 가즈오 문화 공사(中條一夫)가 참석헸다. 일본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처음 추도에 참석한 것이다.

 

 

그동안 이런 행사가 있을 때 관심을 표한 일본측 인사들은 있었지만 직접 한국인들이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기는 처음이었다. 행사는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의 김병윤 부회장과 노치환 사무총장이 준비했다. 우리 쪽에서는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이 가장 어른으로서 추도의 말씀을 해주셨고 일본 쪽에서 나온 주쵸 공사가 의미있는 추도사를 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최악(最惡)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있으나, 민간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한국인들이 일본 음식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고, 맛있는 것은 맛이 있는데...그것을 누가 막는다는 말입니까. 상대방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5년 전에 혼자서 이 묘소를 찾은 일본광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 髙橋妙子)씨는 일본 국내 언론에 이렇게 기고를 했다.​

 

"그날은 참말이지 화창한 봄 날씨였습니다. 망우리는 봄꽃들로 넘쳤고, 백자 항아리를 형상화한 다쿠미의 묘비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도가 권영석 씨의 헌차(獻茶)가 있은 뒤, 참가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묘소에 헌화하며 다쿠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묘비 옆에는 한국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건립한 추모비가 서 있고, 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전후 오랜 세월 다쿠미의 묘소를 보살펴온 것은 바로 이들 임업시험장 분들이었습니다. 곧, 전후 일본과 일본인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을 지워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다쿠미의 묘만은 끝까지 건사해온 것입니다. 17년 동안 조선에 살면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헌신한 그를 아는 분들에 의해서…. 한국 각지를 여행할 적마다 분로쿠・게이쵸노에키(임진・정유재란) 때에 히데요시(秀吉)의 군대가 파괴했다는 곳이나 식민지 시절 일본이 저지른 잘못의 흔적을 만나곤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이상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숙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아사카와 다쿠미나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소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것은 우리 일본인들로서 마냥 고맙고 감명 깊은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한국인에 의해 지켜지고 사랑받는 까닭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쿠미는 이웃 조선 사람들을 친구로 생각하고 대우해 준 많지 않은 일본인 친구였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보호해주고 기려주는 것이다. 한일 두 나라의 진정한 우정의 가교에 다름아니다. 마치 20년 전 기차가 달려오는 데도 선로에서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역 구내에 뛰어들어 산화한 이수현 씨처럼 말이다.​

 

추도식장에서는 김미희 시인의 헌시낭송에 이어 서울 일본인교회 교인들이 추모음악을 연주했다. 특히 리틀 최승희로 불리며 지난 2018년 ‘봄이온다’ 평양공연에서 환상적 춤으로 개막 무대를 연 무용가 석예빈씨가 한ㆍ일해빙을 기원하는 헌무 ‘현해탄의 봄나래’를 춤으로 펼쳤다.

 

 

 

 

당일 현장을 취재한 일본 교도 통신의 기자가 필자에게 다쿠미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더니 한국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추도식이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말했다. 5년 동안 한국에 근무하다가 일본 본사로 돌아간다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호리야마 아키코(堀山明子) 지국장은 이제 서야 이곳을 찾은 것이 죄송하다며 한동안 울먹이다가 일본에 돌아가서 아사카와 다쿠미를 지켜주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잘 전하겠다고 했다.

 

아 이제 근 백 년이 되어야 그 진심이 통하는 것인가? 이날 다쿠미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마음을 이어가고 싶은 많은 한국인, 일본인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일본인, 우리도 과거 아득한 고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이제 일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을 마다치 않는 한국인들도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기억하고 그것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 서로의 원한을 씻어내고 어두운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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